제 I 부 구술 실록 032 나와 시중쉰의 섬감 변구 근거지 혁명 세월 장방잉(張邦英) 041 중앙 정책 결정에 대한 서북국의 영향 허자이(何載) 051 시중쉰 서기를 그리며 마쑹린(馬松林) 082 시중쉰 선생과 함께 보낸 잊지 못할 20년 장즈궁(張志功) 096 황즈, 시중쉰과 함께했던 나날을 회상하다 스훙(史宏) 107 나는 서북국을 위해 식량을 책임졌다 장전방(張振邦) 116 시중쉰 곁에서의 8년 쑨빙원(孫炳文) 124 서북국 - 내 일생의 아름다운 기억 사오지야오(邵繼堯) 140 시중쉰 서기를 기억하며 마수팡(馬淑芳) 146 내가 걸어온 길 장커(張克) 169 영원한 그리움 장위잉(張玉英) 187 서북국의 화려했던 옛이야기, 그리고 섬서에 대한 나의 감회 지스린(吉世霖) 195 서북국에서의 즐거웠던 나날들 하오수화(?樹華) 206 서북국 시절을 그리며 펑소우런(彭壽仁) 216 서북국에서 더성 동지와 함께한 나날들 왕즈창(王志强) 225 부모를 따라 서북국과 함께 섬북을 전전하며 전쟁을 하다 왕샤오민(王效民) 232 시라오 일가와의 깊은 정 왕추잉(王秋英)
제 II 부 붓 아래 역사 242 서북군정위원회의 한 해 - 펑더화이 동지의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며 창리푸(常黎夫), 지예리(姬也力) 251 시중쉰의 서북국 활동을 기억하며 마원루이(馬文瑞) 282 시중쉰 동지의 혁명 생애를 회고하며 쑨쭤빈(孫作賓), 뤼젠런(呂劍人) 304 시중쉰과 횡산 기의 리펑취안(李鳳權) 321 시중쉰의 혁명 업적을 기억하며 판밍(範明) 339 마오쩌둥의 시중쉰 평가 탕뤄(湯洛) 350 실사구시를 견지한 시중쉰 서기 안즈원(安志文) 356 다년간의 교류를 통해 본 진실 후징퉁(胡景通) 364 토지개혁에서‘좌’적 오류를 방지한 시중쉰 자쥐촨(賈巨川) 384 진중하고 듬직한‘백중(伯仲)’의 정의(情誼) - 서북국에서 시중쉰과 자오보핑의 나날들 치신(齊心) 391 자퉈푸의 서북국 생활을 회고하며 치신(齊心), 저우웨이런(周維仁) 403 황즈를 기억하며 마원루이(馬文瑞), 창리푸(常黎夫), 리리안(李力安), 리즈원(李治文), 지예리(姬也力) 418 원로 영도자이자 뛰어난 스승인 창리푸를 애도하며 지예리(姬也力), 왕보후이(王伯惠) 424 연안 정신과 작풍을 지닌 공산당원 - 전우 차오리루 동지를 회념하며 시중쉰(習仲勳), 마원루이(馬文瑞), 장슈산(張秀山), 위안런위안(袁任遠), 장방잉(張邦英), 장다즈(張達志) 432 짧지만 멋진 인생 - 서북국에서 차오리루 동지의 활동을 회고하며 456 서북국 시절 쑨줘빈의 활동 쑨샤오베이(孫曉北)
제 III 부 거대한 위업 468 건국 초기 펑더화이의 대서북 개발을 위한 구상과 실천 치러슝(祁若雄) 481 서북 해방전쟁중의 펑더화이와 민족 사업 머우후이펀(牟慧芬) 495 대서북 시기의 펑더화이 허리보(何立波) 514 시중쉰의 종교공작 책략 시론 리원산(李文珊), 천뎨어우(陳?鷗) 524 시중쉰과 통일전선 류리쥔(劉立軍)
우리에겐‘연안’으로 더 익숙한‘서북’은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더없이 중요한 곳이다. 서북은 1935년 10월 1년여에 걸친 대장정을 끝낸 중국공산당 홍군이 재기할 수 있었던 터전이자 혁명의 근거지였다. 그리고 서북국은 1941년 5월 13일 중공중앙서북국으로 시작하여 1966년까지 지속된 서북 지역 공산당원의 요람이었다. 1930년대부터 혁명의 불꽃이 타오른 서북의 공산당원들은 시중쉰과 펑더화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서북국을 알아야 중국공산당 정신을 알 수 있어
《시중쉰, 서북국에서의 나날들》의 원제는《在西北局的日子里》로 중국공산당의 가장 전성기인 연안 시절에 있었던 주요 활동 상황을 시중쉰과 함께했던 동료들의 증언으로 기록한 구술역사이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보고자 했던 것은, 시진핑 부친 시중쉰의 연안시대 활동상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시중쉰이라는 인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동료들과 이웃집 촌부들의 소박하고 진솔한 기억이 담겨져 있다. 그들의 증언에는 시중쉰이라는 인물의 면면과 영도적 활동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더불어 이 책 속에는 함께했던 옛 동지들과의 사진이 많이 실렸는데, 시진핑 주석의 어린 시절 모습도 곳곳에 나온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친인 시중쉰은 중국 역사, 그리고 공산당 부흥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시중쉰은 산시성(陝西省)푸핑(富平) 사람이며, 부인은 치신(齊心)이다. 1926년 공산주의청년단(약칭 공청단) 가입 후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8대 원로 가운데 한 명으로 덩샤오핑과 동등한 위치에서 일한 제1야전군 계통의 원로이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28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2년 산시성 웨이허 강 북부 지역에서 게릴라전에 참여했으며, 1932~36년 산시·간쑤에서 농민운동을 지도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49년 중앙 서북국 서기, 제1야전군 정치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2년 중국공산당 회의에서 펑더화이에 관한 결정에 반대함으로써,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았다. 1967년 류사오치 일파로 지명되어 비판받고 실각되었다. 이듬해 4월 산시성 혁명위원회 성립 후 추방당했다가 1977년 2월에 복권되었다. 1980년 9월 제5기 전인대 제3회 회의에서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보선되었다. 1981년 6월 6중전회에서 중앙서기처 서기가 되었다.
《시중쉰, 서북국에서의 나날들》은 그 어떤 책보다도 강렬하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 책을 한국어판으로 출간하게 된 배경은, 한국과 중국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진핑 정부가 들어서면서 중국은 대국에서 강국으로 성장했다.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는 이제 중국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한국은 경제의 3분의 1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갈수록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 잘못된 상식으로 중국을 제국으로 알고 있다. 이번 사드 문제로 한중 관계는 시련을 맞고 있다. 이러한 선택적인 문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제라도 중국을 제대로 깊이 알아야 한다. 시진핑 주석의 앞으로의 행보를 알려면 그 뿌리를 알아야 한다. 그에게 가장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부친 시중쉰을 알아야 시진핑을 이해할 수 있다.
시진핑을 알려면 그의 부친 시중쉰을 알아야
시중쉰을 알려면 연안시대(延安時代)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연안정신이라면 화합, 상생불색, 중국민의 위대한 부흥을 든다. 이는 현재 시진핑 정부가 내세운 정책과 일맥상통한다. 그런 의미에서《시중쉰, 서북국에서의 나날들》은 우리에게 해답을 줄 수 있다. 옆에서 지켜봤고, 경험했던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시중쉰이라는 인물이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소박하게 다가온다.
공산당에 있어 연안 시기는 가장 전성기로 꼽힌다. 공산당이 이 시기에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는 이유가 이 책에 나타난다. 시중쉰은 중국공산당에 있어 가장 강직한 인물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통찰하는 그의 능력이 고스란히 시진핑 주석에게서 투영된다.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시진핑 주석의 뿌리는 부친인 시중쉰에서 출발한다. 시진핑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도 부친 시중쉰이다.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서를 통해 우리는 서북국의 존재와 더불어 현대 중국을 건설하는 데 피와 땀을 흘린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현대 중국 정치권력의 주류도 아니고, 중앙에서 역사의 조명을 받았던 사람들도 아니다. 하지만 변두리의 삶에 결코 주눅들지 않았으며, 혁명이라는 자신들의 책무에 누구보다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진핑이라는 걸출한 정치가를 통해 국가주석을 배출하는 영광을 얻었다.
서북인의 기질을 한두 마디로 단정할 순 없지만, 서북의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인 서안을‘가장 남성적인 도시’로 보는 것처럼 대범하고 강인한 남성성이 특징이다. 특히 격양된 목소리로 급박하게 내지르는 진강(秦腔: 서북지방의 지방극)의 노랫소리는 그들의 웅장하고 사내다운 기개를 보여준다. 열정과 의리도 빼놓을 수 없다. 본서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서북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시중쉰이 혁명가이기 전에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지를, 중국인들이 왜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지를, 시진핑이란 인재가 거저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수긍하게 된다.
시진핑을 제대로 알려면 서북정신을 알아야
상대를 정확하게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다. 지금 한중 관계는 경제적 이해를 넘어 인문유대강화를 통해 세계로 진출하고자 한다. 정확하게 알고, 이해를 통해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시중쉰, 서북국에서의 나날들》은 한중 인문유대강화를 다지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은 시진핑 주석의 모친이 직접 읽고 몇 군데 잘못을 고쳐주셨다. 한국어판 출간 역시 시안 당국과 시주석 모친에게 보고되었으며, 한국어판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다고 한다. 한중 간의 껄끄러운 현재 상황을 지혜롭게 넘기고, 보다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국어판을 펴낸다. 한중 간의 우호를 위해 노력하는 양국의 많은 분들이 한국판 출간을 격려하고 후원하였다.
책속에서
[P.88~92] 시중쉰 서기는 직업혁명가이다. 그는 자기 일생의 대부분의 정력과 시간을 모두 그의 사업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업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내와 자녀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깊은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 1949년 3월 1일, 그와 치신의 첫번째 딸이 연안의 교아구(橋兒溝)에서 태어났다. 장모인 덩야오전이 말했다.“손녀가 교아구에서 태어나 아이 이름을 끝 글자를 따서‘차오차오’라고 지었지요.” 당시 시중쉰 서기는 서백(西柏)에서 당의 7차 2중전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딸을 낳았다는 전보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연안으로 돌아온 그는 딸을 품에 안고 가만히 작고 여린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업무를 보다가 겨를이 나면 그는 자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차오차오를 품에 안았다. 한 번은 그에게 안겨 있던 딸이 오줌을 누자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자식 오줌은 지리지도 않네. 지리지도 않아.” 차오차오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착해서 각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차오차오 역시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다. 나이가 들어 업무의 2선으로 물러났을 당시 무장경찰총부에서 판공실 주임 겸 대외판공실주임(正師級)이었던 차오차오는 자진해서 자리를 내려놓은 후 10여 년 동안 아버지를 보살폈다. 둘째딸은 서안에서 출생해서 이름을‘안안’이라 지었다. 매일 언니인 차오차오와 붙어다니는 각별한 자매 사이였다. 진핑과 위안핑 두 형제는 어릴 적부터 씩씩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착하고 귀여운 모습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중쉰 서기는 항상 공무에 매여 있던 몸이지만 시간만 나면 되도록 아이들과 어울렸다. 당시는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주말이 되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와 한데 엉겨붙어 놀았다. 시중쉰 서기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모든 아이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는 수시로 아이들과 어울렸지만 어쩌다 아이들을 울리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재빨리 아이를 달래며 천륜의 정을 나누면서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줬다. 시중쉰 서기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절대 버릇 없이 키우진 않았다. 그는 명절이라 공무가 없는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가거나 지인들의 모임에도 참석하고 거리 구경에 나서기도 했다. 때로 아이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장난감을 사지 못한 아이들이 토라지면 그는 참을성 있게 아이들을 달래기만 할 뿐, 절대 다른 사람들이 대신 사주거나 선물을 주는 등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공부에 열중했다. 모두 어린이책, 이야기책을 즐겨 읽었다. 시중쉰 서기는 서점을 돌아볼 때마다 내게 여러 종류의 책을 사도록 했다. 책을 받은 아이들은 마치 책에 굶주린 아이처럼 손에서 책을 놓을 줄 몰랐고, 이렇게 책을 읽는 사이 국내외 동서고금의 여러 가지 기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시중쉰 서기는 평생 동안 근검절약하며 자신의 말을 몸소 실천했다.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절약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의 가족들의 근검절약 태도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 시중쉰 서기는 매번 욕조에서 목욕을 마친 후 다시 두 아들을 씻기고, 다시 그 물로 세탁을 했다. 그는 마치 쌀 한 톨을 아끼듯 물 한 방울도 아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과 식사를 할 때에도‘그릇 속 밥알 하나하나 모두 고통과 힘겨움이라’라는 당시(唐詩) 명구로 아이를 교육하여, 식탁이며 바닥에 떨어진 밥알 하나까지 집어 모두 깨끗하게 낭비하지 않고 먹도록 했다. 이러한 절약의 미덕은 시중쉰 집안 대대로 이어졌다. 아이들의 옷과 신발·양말은 차례대로‘릴레이’하듯 이어졌다. 큰애가 입다 낡은 옷은 기워서 다시 어린애가 입었다. 누나 차오차오가 입었던 옷과 양말·신발 등을 동생인 진핑과 위안핑이 입었다. 누나의 꽃무늬 천 신발을 받아 신어야 했던 진핑은 친구들이 놀리지나 않을까 해서 입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중쉰은 먹물로 꽃무늬 신발을 까맣게 칠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독립적이며 절약하는 습관을 키워 주기 위해 아이들 네 명은 팔일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주말에 한 번 집으로 돌아왔다. 매달 식사비 12위안과 매주 집에 올 때 버스비 이외에 용돈은 지극히 적었다. 아이들은 원래가 천성적으로 놀기 좋아하고 군것질을 즐긴다. 때로 영화를 보거나 아이스케이크 같은 간식을 사먹기 위해 버스비를 쓰고 나면 집에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지쳐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차오차오가 동생들 손을 끌고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 차를 탔다. 차비를 정거장 수에 따라 받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버스비를 아껴 영화를 보거나 아이스케이크를 사먹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게 돈을 달라고 했다. 겨우 1위안도 안 되는, 때로 몇 전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나는 모두 기록해 월말에 시중쉰 서기에게 보였다. 시중쉰 서기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딸인 차오차오는 초등학교 졸업 후 하북의 북경중학에 합격했다. 학교가 집에서 한 정거장 거리밖에 되지 않았지만, 딸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시중쉰 서기는 차오차오를 계속 학교에 기숙하며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도록 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했다. 당시 학교의 숙식 환경은 지극히 열악했다. 학교 식당 밥은 잡곡이 70%였다. 당시 시중쉰 서기는 국무원 부총리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항상 신문에 오르락거렸다.‘시’성이 드물었기에 사람들은 부총리의 딸일는지도 모른다는 연상을 하기가 쉬웠다. 시중쉰 서기는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이 딸의 신분을 파악하지나 않을까 하여 딸에게 엄마 성을 붙여 주고, 가정 성분 역시‘혁명간부’에서‘직원’으로 바꿨다. 이렇게 지어진 치차오차오(齊橋橋)라는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시중쉰 서기는 항상 아이들에게 자신의 능력으로 먹고 살도록 교육했고, 고생스러운 곳, 기층민이 있는 곳, 조국 건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곳에 가서 일하도록 권했다. 시중쉰 서기의 엄격한 교육과 가정 환경 덕분에 아이들은 매우 자립적이며 강한 인물로 성장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당과 국가의 인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