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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대화로서의 영화 : 기생충·티탄을 넘어 / 김준희 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희망읽기, 2023
청구기호
791.43015 -24-2
자료실
[부산관] 주제자료실(2층)  도서위치안내(부산관)
형태사항
249 p. : 삽화, 도표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91197205149
제어번호
MONO12024000006732
주기사항
부록: 에피쿠로스적 전환
참고문헌: p. 232-238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23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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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 대화를 위한 전제들
1-1. 미메시스 역량
1-2. 대화와 이야기
1-3. 영화와 감응
2. 프레이밍 :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
2-1. 프레이밍의 매트릭스
2-2. 〈기생충〉의 프레이밍
2-3. 〈티탄〉의 프레이밍
3. 감응 체계 : 영화와 관객의 대화
3-1. 감응 체계와 감응의 순간
3-2. 〈기생충〉의 감응 체계
3-3. 〈티탄〉의 감응 체계
4. 파토스 포멜 : 관객과 세계의 대화
4-1. 파토스 포멜과 징후적 영화
4-2. 완벽한 그물망 속 액체
4-3. 금발과 스킨헤드를 가로질러
5. 대화로서의 영화
나가며
부록 : 에피쿠로스적 전환

참고 문헌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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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B000093252 791.43015 -24-2 [부산관] 주제자료실(2층)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죽은 게 아니라면 주고받는 삶을 꿈꿔야 한다.
    혐오와 차별의 독백이 아닌
    공생하는 대화로서의 영화를 탐색하는
    MZ세대 저자의 특별한 여정!

    일상적 통찰에서 시작, 철학·과학을 경유해
    <기생충>의 한계를 인식하며
    <티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대화로서의 영화의 열린 구조를 해명하는
    치열하고 탁월한 구성!


    책을 시작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영화에게 바치는 헌사지만, 생에 바치는 찬양가이기도 하다”고. 영화의 생명이 관객의 감응을 촉발해 생의 고양을 촉진하는 성찰적 대화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와 세계의 무한한 마주침을 통한 주고받음으로 열려 있는 대화적인 삶이 생의 의미를 재충전해주는 영화의 원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과 생의 열린 대화의 이 무한한 연쇄 고리로 우리를 감싸 안는 영화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다. 대화로서의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촉진하는 영화보다 대화의 외양을 띠지만 정작 독백으로 그치는 영화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탓이다. 저자는 갑갑한 독백의 벽들을 돌파할 생산적 활로를 찾기 위해 일상의 통찰, 철학과 뇌과학, 복잡계 과학과 영화 이론 등을 횡단한다. ‘시공간적 프레이밍’과 ‘감응과 미메시스 역량’이라는 개념적 도구를 벼려내기 위해서다. 이로써 세계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생충>(2019)과 <티탄>(2020)을 - 100 페이지 이상의 분량을 할애해 - 시퀀스별로 촘촘히 비교 분석한다. 그 결과 기존의 세평과는 판이한 새로운 평가를 끌어낸다.
    <기생충>은 이미 정해진 길로 이끌기 위해 관객을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자극적으로 흔들어댄다. 그러나 스크린으로부터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관객은 그저 멍한 상태가 되어 그 의미를 이리저리 찾아보기 위한 퀴즈쇼의 참여자가 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독백적인 영화다. 반면 <티탄>의 프레이밍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상징계적 질서에 의해 억압된 타자의 문제로 풀어낸다. 상징계에 예속된 주체를 넘어서 상징계적 질서 자체의 거듭남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알렉시아의 시도와 좌절은 뱅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갈수록 커다란 파동을 그리며 알렉시아와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파동은 끝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뱅상을 주체화하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 대화적이다.
    감독의 명성, 새로운 배우들의 등장, 소재와 스토리의 시사성, 자극적인 대사 등 겉으로 드러난 장면들에 시선을 빼앗기거나 유명 평론가들의 해석에 끌려가는 영화 읽기 대신 저자는 문제들과 씨름하는 가운데 미메시스 역량의 생성을 보여주는 시공간적 프레이밍의 역동적 흐름을 짚어내고 있다. 영화와 관객 간의 감응을 촉진하는 “찰나의 순간”들을 찾아내 양자를 겹쳐 보면서 열린 대화의 가능성 여부를 타진한 입체적인 분석의 결과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기생충>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티탄>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화는 어떤 윤곽을 지닐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격정(파토스 포멜)의 에너지로 하여금 영화적 시공간에 감응하고, 그 감응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이끌어내 다시 새로운 파토스 포멜의 에너지가 불어넣어지는 영화. 그리하여 영화적 시공간을 나의 현실적 시공간과 연결시켜 보다 확장된 영화적 시공간으로 몽타주하는 영화가 그것이라며 이 흐름을 다이어그램으로 압축해 보인다.

    미메시스 역량은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몸의 무게 중심과 같다. 어포던스를 취득하기 위한 한쪽 발에 무게중심을 둘수록, 오토포이에시스를 발휘하는 다른 쪽 발의 무게중심은 약해진다. 한쪽 발에 두었던 무게중심을 다른 쪽 발로 이동하지 않으면,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전거와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어포던스와 오토포이에시스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힘으로서의 미메시스 역량은 위의 그림처럼 경로를 계속해서 이동시켜 유동적으로 흘러야 하는 것이다.
    그 흐름은 M1-M2-M3-M4-M1-M5-M6-M7-M1과 같다. M1에서 M3으로 넘어갈수록 미메시스 역량은 어포던스를 취득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려고 할 것이며, M1에서 M6으로 넘어갈수록 미메시스 역량은 오토포이에시스를 발휘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길 것이다. 미메시스 역량이 균형점을 지날 때마다 미메시스 역량을 지닌 이의 상태는 이전과 다른 상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발을 구를수록, 자전거가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사람에게 내재한 다중지능적 네트워크를 촉발해 자전거를 타고 나아가듯이 관객의 미메시스 역량을 활성화하는 것이 <대화로서의 영화>를 찾아 먼 여정을 돌아온 저자의 독창적인 답변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 난해한 영화 언어들의 체계를 제시하면서 정작 구체적인 작품 분석에 적용하기 힘든 영화이론서들이나 개별 작품이 주는 감동을 세세히 기술하면서 그 타당한 근거를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일반적인 비평서들과는 근본적으로 결을 달리한다. 이론적 탐색이 실제적인 영화의 창작 및 수용과 분리되지 않고, <현실→영화→관객의 감응→새로운 현실>로 나아가는 복합적인 과정의 생산적인 징검다리로 이어지기 있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는 이론과 창작과 비평과 관객의 수용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려는 이런 치열한 노력을 통해 현실에서 빚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에 속박되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또 다른 현실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하는 대화적인 영화의 윤곽이 그려진다.

    책의 구성

    살아있는 대화로서의 영화를 꿈꾸는 저자의 열정은 <1. 대화를 위한 전제들>에서 시작해, <2. 프레이밍 :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와 <3. 감응 체계 : 영화와 관객의 대화>, 그리고 <4. 파토스 포멜 : 관객과 세계의 대화>를 거쳐 <5. 대화로서의 영화>로 나아가는 이 책의 다층적인 여정 자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화로서의 영화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여정의 첫 번째 관문은 대화와 영화에 대한 고찰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있다. <1. 대화를 위한 전제들>에서 대화와 영화의 접착제로서 ‘미메시스 역량’과 ‘감응’ 개념을 제시한다. <1-1. 미메시스 역량>은 벤야민의 미메시스를 인지생태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심광현의 이론을 경유해 이 시대에 필요한 역량으로서의 미메시스 능력을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미메시스 역량을 소개한다. <1-2. 대화와 이야기>에서는 바흐친의 대화 이론을 토대로 미메시스 역량이 대화의 사슬을 이어나가도록 하는 과정을 이차적 담화 장르인 이야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이를 영화의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1-3. 영화와 감응>에서는 마크 한센이 뉴미디어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핵심으로 제시한 ‘감응’을 복잡계 과학을 빌려 재해석하면서 미메시스 역량에 의한 대화로서의 영화가 관객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해 검토한다.
    2부터 4까지는 1에서 구성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기생충>과 <티탄>을 세 개의 대화로 나누어 분석한다. <2. 프레이밍 :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에서는 데이비드 하비가 자연철학적 시공간과 인식론적 시공간을 교차시켜 3×3의 행렬로 표현한 시공간 유형을 토대로 영화의 장면을 시공간 유형에 따라 영화의 프레이밍에 담긴 창작자가 세계와 나눈 대화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3. 감응 체계 : 영화와 관객의 대화>에서는 이미지가 나타내는 정보에 따른 새로움과 확인의 상태의 변증법적 작용으로서의 ‘감응’ 개념을 토대로 장면의 감응을 하나의 감응 그래프로 나타내어 영화의 감응 체계가 관객과 이루는 관계를 다룬다. <4. 파토스 포멜 : 관객과 세계의 대화>에서는 아비 바르부르크의 ‘파토스 포멜’과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징후’ 개념을 경유해 영화의 에너지가 관객이 세계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는지 분석한다. 마지막 <5. 대화로서의 영화>는 2부터 4의 내용을 기반으로 대화로서의 영화의 윤곽을 간략하게 구체화한다.

    수평적 대화를 촉진하는 마주침의 중층적 의미

    독자들로서는 각 장마다 등장하는 낯선 개념들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개념들 모두 대화로서의 영화에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디딤돌’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미메시스 역량과 감응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 프레이밍의 시공간 유형을 분석해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를 추적하고, 영화가 만들어내는 감응을 엮어 비평형 산일구조로서의 감응 체계인지 검토하는 과정은 모두 대화로서의 영화를 찾기 위해서였다. (…) 우리가 영화를 “단지 ‘객체 또는 관조’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하지 않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파악한다면, 영화는 반드시 관객으로 하여금 관객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대화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는 괴물처럼 몸을 불리는 상품으로써 소비되는 데 그칠 것이다.>

    MZ세대는 직업, 외모, 학력, 재력 같은 외적 가치를 비교하기보다 내면을 이해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 위해 MBTI 성격 유형을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정교하고 복잡하게 발전한 현대 심리학보다 1944년에 개발된 이 낡은 유형론이 잃어버린 관계성과 행복감을 되찾는 데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신자유주의 사회가 강제하는 수직적인 사다리 오르기의 경쟁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각자의 실존적 차이를 존중하는 수평적인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에 대한 열망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MZ세대인 저자가 대화의 전제가 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를 힘겹게 벼려내 창작자와 세계의 대화를 거쳐 영화와 관객의 대화, 관객과 세계의 대화로 나아가는 치열한 열망도 이런 전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중층적인 대화의 연쇄 고리가 활성화되려면 외향/내향과 같은 정태적인 분류에서 멈춰서는 MBTI의 성격 유형을 역동적인 뇌과학적 상호작용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MBTI 성격유형에서 S(감각)와 T(사고)를 규정하는 좌반구와 N(직관)과 F(감정)에 관여하는 우반구가 뇌량을 매개로 <마주쳐야만> 온전한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화를 단절시키는 독백은 좌반구나 우반구 어느 한쪽의 능력만 부추길 때 발생한다. 맥락을 소거하고 대상에만 집중하거나 대상 없이 맥락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원활한 대화는 누군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거나 쥐려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답하기를 기다릴 때에만, 다시 말해 좌우뇌를 함께 사용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작자와 영화와 관객과 이 모두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대화(마주침)는 각자의 내면에서 감각과 사고, 직관과 감정 사이의 마주침(감응과 대화)이 활성화될 때에 가능해지며, 그 역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것이 지속적인 대화, 즉 마주침의 생성과 연쇄 과정이며, 수평적인 삶으로의 진정한 전환이 일어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저자는 이렇게 중층적으로 연결된 대화, 감응, 마주침, 수평적 삶으로의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유해 <에피쿠로스적 전환>을 선언한다. 책의 서두에서 긴 여정의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고, 말미의 부록을 통해 다시 그 의미를 반추하는 이 전환이 단순한 수사학적 비유가 아님을 저자는 복잡계 과학과 맑스의 철학을 엮어 체계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원자와 허공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원자는 ‘무게’로 인해 수직 낙하 운동을 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으나, 그 운명을 거스르는 ‘비껴가는 운동’을 통해 다른 원자와 충돌하고 그로부터 사물이 생성하고 변화하고 소멸된다. 저자는 원자의 비껴남을 마투라나-바렐라가 말한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산) 능력과 같다고 보면서, 이를 다시 복잡계 과학이 말하는 열린 비평형계의 ‘요동을 통한 질서’의 창발과 연결한다.
    나아가 저자는 이를 시간에 대한 감각과 연결한다. 엔트로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평형 상태에서는 시간이 무의미하며, 시간이란 원자와 허공의 관계와 원자들의 운동을 통해서만이 지각될 수 있는 “사건의 사건”(맑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시 사건이 사건화되는 것을 신체적 프레이밍으로서의 감응이 일어나는 순간과 연결한다. 요약하면, 원자들의 비껴가는 자유 운동으로 마주침이 발생하고, 열린 비평형계가 요동을 통한 질서를 형성하는 자기갱신을 이룰 때 감응이 출현하고, 이 감응의 순간이 바로 시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질문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며 제시된 해결들의 연쇄 고리들은 모두 “살아있는 영화와 함께 나누는 우리의 대화가 독백이 되어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혹여 독백이 되어 흩어진다고 할지라도, 다시 그러모아 대화의 사슬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간절한 열망의 산물이다. 저자는 그 바람이 흩어지지 않도록 <대화로서의 영화>를 세 가지 테제로 요약해 글을 마무리 한다.
    첫째, 영화는 세계에 대한 응답이다. 영화의 프레이밍은 늘 이미 선재하는 발화에 대한 응답이며, 스크린에 펼쳐져 관객과 만나는 영화의 프레이밍은 관객의 응답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둘째, 영화에 대한 응답은 감응을 통해 이루어진다. 관객이 영화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스스로 합성해내면서 비로소 영화는 영화가 된다. 관객이 참여자로서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스크린과 마주할 때, 영화는 비로소 살아있는 것이 된다.
    셋째, 영화는 이미 선재하는 세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발화이기 때문에 관객의 영화에 대한 발화 역시 세계에 대한 응답이다. 그 응답으로서의 발화에는 창작자가 세계와 나눈 대화, 관객으로서 영화와 나눈 대화, 그리고 자기 자신을 비롯해 현존하는 모든 어포던스를 오토포이에시스를 통해 나눈 미메시스적 대화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 그 미메시스적 대화의 감각을 체현한 몸으로 하여금 독백을 대화로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 대화로서의 영화가 할 수 있고 또 해내야 하는 것은 결국 독백의 세계를 대화의 세계로 변혁시키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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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속에서 (알라딘 제공)

    [P.7]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이 아니고 세계감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이다.”(이문재)

    영화는 시인이 말한 세계감을 회복시켜 주는 인생의 스승이자 친구이고 연인이었다. 결핍을 마주하게 하고, 욕망을 들끓게 하고, 그러다가도 찰나의 깨달음으로 삶을 뒤집고, 그러나 결국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현실과의 괴리에 앓고, 마침내 울분을 토하며 지난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화해하게 하는 영화는 무엇보다도 늘 나를 충만하게 했다. 이 책은 영화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영화가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상상하며 보다 더 좋은 영화가 되기를 바라며 건네는 편지다.
    [P. 8] 생은 주고받음의 연속이다. 무엇도 주고받지 않는 생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이 주고받음으로서의 생을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영화가 내게 건넨 것과 내가 영화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아무 것도 아닌 영화는 열병을 앓게 할 뿐 침묵했다. 그때 나에게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대안대학 지식순환협동조합에서 만난 맑스와 에피쿠로스였다. 맑스와 루크레티우스를 거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만나면서 세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못지않은 이 인식론적 전환은 나에게 ‘에피쿠로스적 전환’이 되었고, 영화와 생을 주고받는 여정 또한 변했다.
    [P. 18~19] 미메시스 능력은 아이들의 놀이Spiel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난다. (…) 아이들은 자신이 경험한—
    보고 겪은—
    엄마, 아빠, 의사, 환자, 영웅과 악당을 따라 하며 즐긴다. 그리고 이 놀이를 수행적 연기와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행한다. 성인들도 마찬가지다. (…) 연인의 표정과 몸짓만으로 연인의 상태를 알아챌 수 있는 건 미메시스 능력 덕분이다. 우리의 뇌는 타인의 표정과 몸짓을 가상적으로 흉내 내고, 이미 알고 있던 기분 혹은 상태와 연결 짓는다. 이 과정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총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경험을 통해 알 것이다. 당신이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는 미메시스를 통한 앎의 순간들로부터 만들어지고, 이 앎은 미메시스 과정이 축적될수록 점점 더 정교해진다. 미메시스 능력은 타인 혹은 타자라는 외부 세계와 ‘나’라는 내부 세계를 연결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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