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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ABSTRACT
목차
I. 서론 9
II. 신종 범죄와 사회 문제들 13
1. 화폐의 위조 15
2. 매춘의 성행 21
3. 두형의 문란과 밀무역 25
1) 두형의 문란 25
2) 밀무역의 성행 27
4. 아편 흡연과 총기류 사건 30
III/IV. 조계지내 갈등과 대립 35
1. 조선관민과 거류민들 간 갈등 37
1) 조선 관민과 거류민의 충돌 37
2) 전염병의 예방과 검역 과정의 갈등 41
2. 조선 상인과 일·청상인 간 갈등 44
1) 상권확보를 위한 경쟁 44
2) 인천신상협회의 설립과 갈등 48
3) 미두취인소의 설치와 대립 51
3. 각국 조계지 거류민들 간 갈등 56
IV/VI. 결론 63
참고문헌 66
국문초록 71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1883년 9월)을 비롯한 청국(1884년 4월)과 서양 제국들(1884년 10월)은 조선과 앞을 다투어 조계장정을 체결하고 인천에 조계를 설정하였다. 특히 인천의 조계들이 특이한 것은 앞서 설치된 부산과 원산의 조계들과 달리 서양 제국들의 ‘각국조계’가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조계지 인천은 감리서와 해관이라는 특수한 이원적 체제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근대적인 우편제도와 은행과 회사, 그리고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었다. 또한 전기와 상수도가 들어오고 공원이 설치되었으며 근대적인 위생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제 인천은 명실 공히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개항기 인천의 조계는 ‘서양근대문물의 수입처’라는 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힘든 조계지 당사자들 간의 갈등과 사회문제들을 동반하였다. 조계지 인천에는 자본주의와 인간의 탐욕, 그리고 가치관의 병리현상이 빚어낸 각종 사회문제와 범죄들이 발생하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화폐의 위조와 사주(私鑄)가 만연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식 유곽이 들어옴에 따라 매춘이 성행하였고, 이에 따라 전염병 문제와 기녀(妓女)들을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밖에 당시 조선 제일의 무역항이었던 인천의 조계에는 무역과 상업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였는데 도량형(度量衡)을 속이고 상거래를 시도하거나 당시에 외국과의 거래가 금지된 홍삼(紅蔘)을 비롯한 백미(白米)와 정조(正租)를 밀무역하려는 시도들이 빈발하였다.
인천조계지에는 조선의 관민과 조계지 당사자들 간의 갈등을 포함하여 상업 활동에 따른 갈등, 그리고 각국 조계지 내의 대립을 포함하는 다양한 형태의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다.
먼저 조선의 관민들과 거류민들 간의 갈등이 존재하였는데, 청나라 원세개의 비호를 받은 청나라 상인들이 인천해관을 공격한 ‘인천해관 사건’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내 상인들은 신상협회(紳商協會)를 조직하여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인천항의 상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천미두취인소 및 곡물협회 등과 경쟁하였다. 끝으로 각국조계 내의 거류민들은 신동공사(紳董公司)란 별도의 자치기구를 구성하였다. 임원 선거 과정에서 임원을 차지하기 위한 개인적·국제적 질투와 암투를 벌여 각 거류민간 세력경쟁을 펼쳤으며 이를 ‘인천정략(仁川政略)’이라고 부르고 있다.
개항기 인천의 조계는 분명 서양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각종 제도를 처음으로 적용한 한국 근대화의 실험실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전신과 기차, 공원과 위생 제도 등이 도입된 곳이 바로 인천의 조계지이다. 그러나 또한 인천의 조계를 이해하는 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당시의 인천 조계가 전근대적인 경제체제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상업경제 혹은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화폐제도와 도량형이 도입되고 관세의 필요성에 따라 해관이 설치되었으며, 상인단체와 오늘날 ‘증권거래소’의 역할을 한 ‘미두취인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전근대적인 상거래 마인드를 가진 조선의 관민들과 외국상인들간 갈등이 발생하였다. 물론 조선인들 중에도 외국상인들과 거래를 통하여 사기와 밀수, 그리고 투기에 열을 올리는 등 일찍이 자본주의적 사고에 눈을 뜬 사람들도 존재하였고 그로인한 사회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거류지 주민들간에도 상거래를 통해 이익을 증대시키거나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위해 서로 경쟁하거나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경쟁에서 일본은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점차 인천의 조계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주로 개항기 인천 조계지에서 발생한 사회문제들과 거류민들간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다 보니 개항기 조계를 구성한 일본과 청국 및 서양 제국들이 조계에서 조선의 관민들을 상대로 자행한 이권 침탈의 양상이라든지 식민화의 과정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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