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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국문요지 6
제1장 머리말 8
제2장 1919·20년 조선의 콜레라 유행 13
제3장 조선총독부 방역당국의 활동 20
제1절 각종 검역 및 단속 22
1) 해항검역 및 선박검역 22
2) 기차검역 및 여객검역 24
3) 각종 단속 26
제2절 환자 및 보균자의 발견과 수용·격리 28
제3절 예방주사 실시 31
제4절 위생사상의 선전 35
제4장 조선인들의 방역정책에 대한 대응 및 방역활동 39
제1절 방역정책에 대한 태도와 경찰과의 충돌 39
1) 당국의 방역활동에 대한 기피와 비판 39
2) 보균자 수용을 둘러싼 조선인들과 경찰의 충돌 44
제2절 한약 竝用과 私設避病院 설립 48
제3절 각 지역 청년회방역단의 활동 55
제5장 맺음말 60
참고문헌 64
부록 68
ABSTRACT 72
〈그림 1〉 1919·1920년 콜레라 환자 도별 그래프 18
본 연구는 콜레라 유행에 대한 방역당국의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는 과정에 주목하여 시행과정에서 어떠한 측면이 반발과 비판을 불러왔는지 살펴보고 이에 대해 조선인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어떠한 방역활동을 전개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식민세력과 피식민세력 사이의 지배와 저항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길 기대한다.
1919년 8월 말 만주와 블라디보스톡을 통해서 조선으로 전파된 콜레라는 약 4달간 환자 1만 6,915명, 사망자 1만 1,533명을 기록하였다. 1920년의 경우 콜레라는 6월 말 일본에서 전파되어 환자 2만 4,229명, 사망자 1만 3,568명이 발생하였다. 두 해의 콜레라는 충북을 제외한 조선 전역에서 발생하였으며, 1919년과 1920년에 콜레라가 창궐했던 지역이 중복되지 않았다. 이는 두 해의 콜레라 유입경로의 차이, 전년도 콜레라 유행 지역 주민들의 면역성 증가, 콜레라 방역 경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조선 인접 지역에서 콜레라가 발생하면 방역당국은 그 침입을 막기 위해 검역을 시행하여 해항검역을 시작으로 선박·기차·여객에 대한 검역을 시행하였다. 조선 내로 콜레라가 유입된 후에는 내부의 전파를 막기 위해 환자 발견에 노력하였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환자 가족과 의사의 신고가 저조하여 검병적 호구조사에 의한 환자 발견이 가장 많았다. 환자 발견과 함께 예방주사도 전국 각지에서 시행되었으며, 위생사상 계발을 위한 예방심득서와 선전서도 배부되었다.
이러한 방역활동은 사람들에게 제약을 가하는 점이 많아 국내외를 오가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 환자가 발견된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제한과 단속이 더해졌다. 이렇게 여러 단속과 금지들이 중첩되면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검역 및 단속 등은 집행되기 이전 여러 가지 정황들을 충분히 고려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않으면 그로 인한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전염병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관습들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대개 방역당국의 활동과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방역담당 경관들의 태도는 더욱 강압적으로 되었으며, 이에 조선인들은 더욱 반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0년 경성에서는 보균자 수용을 둘러싸고 경찰과 조선인들이 세 차례에 걸쳐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격리시설은 시설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기왕에 존재하는 격리시설도 조선인들이 수용을 기피하였다. 이는 피병원에 들어가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에 경성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는 사설피병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조선인들은 피병원에서 한방 치료도 병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이는 사설피병원 설립운동에서 적극적으로 채택되었다. 경성 곳곳에서 사설피병원 설립 움직임이 일어나 효자동에서는 보균자 수용으로 한정되긴 했지만 경기도 제3부의 허가를 받은 피병원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한편, 1920년 각지에서는 자위단 및 방역단이 조직되었는데 몇몇 관 주도 사례를 제외하고 지역 유지나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다방면의 방역활동에 종사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당국보다 더 큰 호응을 얻고 좋은 성적을 내었다. 이를 통해 조선인들은 당국의 태도에 반대할지언정 정책 자체에 대한 반대는 아니었음을 보여주었고, 당국의 경우 인원 부족 해결을 위해 승인한 이들의 활동을 적극 지지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을 정리해보면, 콜레라 유행이라는 현실 앞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콜레라는 공포의 대상이자 공동의 적이었다. 따라서 방역당국과 조선인들의 목표는 동일했다. 방역활동의 목적이나 의도가 무엇이었든 결국 목표는 조선에서의 콜레라 퇴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국은 각종 방역활동에 착수하였고, 그 시행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러한 반발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선인들은 방역당국의 방역책을 기피하고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위단 및 방역단을 조직하여 당국과의 협의 하에 방역활동에 종사하였고, 사설피병원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벌였다.
이렇게 1919년과 1920년의 콜레라 유행에서 보인 방역당국의 제반활동과 조선인들의 대응은 전염병 방역이라는 영역에서 당국과 대중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부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지점을 통해 당국의 일방적인 지배와 대중들의 순응 혹은 저항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식민지배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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