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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I. 서론 9

1. 연구 배경 9

2. 영화 스타일 연구에 대한 역사주의적 논의 12

(1) 영화 스타일의 역사적 연구의 의미 12

(2) 개념으로서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와 대안적 방법론 15

(3) '식민지 근대성'의 관점과 조선영화 27

3. 논문의 구성 32

II. 서구 활동사진에 대한 조선적 실천: 전기응용극에서 연쇄극까지 36

1. 조선영화의 선구자들과 일본의 영향 37

(1) 일본의 전기응용극과 조선에서의 실천 39

(2) 조선영화의 선구자들 45

(3) 조선에서 연속활극영화의 수용 53

2. 연쇄극의 조선적 명명법: '신파연쇄활동사진' 62

(1) 조선의 연쇄극 수용 과정 63

(2) 서양식 활동사진을 의도한 연쇄극 71

(3) 일본 신파 서사와 조선의 연쇄극 78

III. 신파영화에서 구미(歐米)영화로: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일 모색 82

1. 재조선 일본영화인들과 조선영화인들의 협업 시스템 83

(1) 조선영화와 일본영화의 연동 85

(2) 무성영화 전기의 일본인 제작사 92

(3) 무성영화 후기의 일본인 제작사 101

2. 영화극(映畵劇)으로서의 표현방법 113

(1) 무대극에서 영화극으로 113

(2) 화면의 연락 119

(3) 클로즈업/대사(大寫) 125

3. 일본 신파와 서구 활극이 직조된 조선 무성영화 스타일 129

(1) 일본 신파영화의 조선적 번안 130

(2) 서구 활극과 블루버드 영화의 영향 143

(3) 〈카추샤〉 의 일본/조선에서의 수용 149

(4) 서구영화와 접속한 〈아리랑〉 158

IV. 일본영화와 미국(米國)영화 사이: 조선 무성영화 스타일의 정착 168

1. 1930년대 중반 조선영화계의 일본 유학파들 169

(1) 〈나그네〉 의 이규환 174

(2) 〈살수차〉 의 방한준·김성춘·김일해 178

(3) 〈춘풍〉 의 박기채·양세웅·김학성, 〈순정해협〉 의 신경균 183

2. 영화 스타일 담론: 몽타주와 콘티뉴이티 191

(1) 조선영화의 몽타주 192

(2) 콘티뉴이티 담론 200

(3) 토키의 영화연결법 204

(4) 조선영화의 기술 담론 213

3. 조선 무성영화 스타일의 분석 221

(1) 조선영화 촬영대본과 연출용어 222

(2) 시나리오/촬영대본 분석 233

(3) 원판 필름(negative film) 〈청춘의 십자로〉 252

(4) 조선 무성영화와 일본 무성영화의 스타일 비교 271

V. 결론 292

참고문헌 298

국문초록 306

ABSTRACT 310

日本語要旨 315

표목차

[표1] 1919년 연쇄극 상연 이전 '신파신극좌' 김도산의 공연 프로그램 구성 49

[표2] 〈철의 조〉 (32권) 상영기록 58

[표3] 〈백만불의 비밀〉 (46권) 상영기록 59

[표4] 〈회색의 유령〉 (32권) 상영기록 60

[표5] 김도산의 '신극좌'의 연쇄극 상연시 단성사 공연 프로그램 구성 77

[표6] 일본인 제작사를 중심으로 구성한 무성 전기 조선영화 목록 92

[표7] 일본인 제작사를 중심으로 구성한 무성 후기 조선영화 목록 101

[표8] 1920년대 중반 특정달의 영화 장르별 구분 및 필름 분량 134

[표9] '순조선극' 필름의 장르별 구분 135

[표10] 일본 〈곤지키야샤(金色夜叉)〉 개봉기록(~1925) 139

[표11] 일본영화 원작과 조선 무성영화 141

[표12] 미국 연속영화·극영화의 일본 개봉편수 144

[표13] 식민지기 교토 소재 촬영소와 소속 조선영화인 189

[표14] 조선 무성영화에서 사용한 카메라 목록 216

그림목차

[그림1] 〈청춘의 십자로〉 '사과' 상징 쇼트 256

[그림2] 〈항구의 일본 소녀들〉 '털실뭉치' 상징 쇼트 257

[그림3] '전경의 문틀' 쇼트 258

[그림4] '전경의 유리창' 쇼트 258

[그림5] 설정 쇼트의 부재(서커스단) 275

[그림6] 설정 쇼트의 부재(현회의원 집) 275

[그림7] 디졸브를 사용한 쇼트의 나열 277

[그림8] 깊이 연출의 미장센 279

[그림9] 은폐의 미장센 279

[그림10] 소비에트 몽타주 스타일1 280

[그림11] 소비에트 몽타주 스타일2 282

[그림12] 〈항구의 일본 소녀들〉 의 쇼트 배열 리듬 284

[그림13] 〈심청〉 "그 전야" 롱 테이크 장면 288

[그림14] 〈심청〉 방안 대화 장면 290

초록보기

 이 논문은 식민지기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일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서구 활동사진에 대한 조선적 반응과 실천을 보인 초기 영화(early cinema) 시기, 일본 신파영화와 서구영화들을 통해 영화적인 스타일을 모색한 무성영화 전기, 소비에트 몽타주(Soviet Montage) 담론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일본영화와 친연성을 보이는,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일이 정착된 무성영화 후기로 구분해, 콘텍스트/담론/텍스트적 맥락에서 각각 고찰해 보았다. 핵심적인 질문은 조선의 영화인들은 '영화적인(cinematic)' 스타일을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했을까 하는 문제였다.

초기 일본영화와의 비교영화사적 연구를 시도한 본고는, 1919년을 중심으로 전기응용극에서 연쇄극으로 이어지는 제작 과정을 초창기 조선영화의 실천으로 규정했다. 이를 주도한 인력은 단성사(團成社)의 박승필(朴承弼)과 단성사에 소속된 신파극단인 혁신단(革新團)의 임성구(林聖九),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이었다. 물론 이들의 기술 습득은 서구의 다양한 시각흥행물을 수입해 정착시킨 일본으로부터였다. 연쇄극은 서구 연속영화(serial film)와 함께 조선인 상영관의 양대 흥행물이었다. 조선의 전기응용극과 연쇄극은, 조선인 극장가에서 유행하던 서구 연속활극영화에 대한 조선적 반응 즉 극영화 실천의 예비단계로 평가할 수 있었다.

조선의 연쇄극이 "신파연쇄활동사진"으로 명명되었음은, 서구 활동사진에 대한 조선적 반응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의 연쇄극은 연쇄극의 다양한 공연 방식 중 가장 영화적인 형태에 가까웠고, 서구 활극식의 볼거리뿐만 아니라 텍스트 내외에 실사(actulities) 장면들이 삽입되었다. 조선의 첫 필름 촬영 그리고 그 필름이 전체 공연 혹은 하나의 공연 속으로 결합된 맥락은, 톰 거닝(Tom Gunning)의 '볼거리로서의 영화(The Cinema of Attractions)'가 말해주는 서구의 초기 영화 스타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연쇄극의 활극적 요소는, 서구 연속활극이 일본 연쇄극/신파영화에 끼친 영향에서 추출되는 것이었다.

조선 무성극영화의 출발 과정은 재조선 일본영화인과 조선영화인의 관계상을 검토하는 것으로, 기존의 영화사 서술을 극복할 수 있었다. 초창기 조선 극영화는 일본인 자본가들 즉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의 '동아문화협회', 다카사 간초(高佐貫長)를 중심으로 설립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주도했다. 하지만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만큼이나 동아문화협회의 김조성(金肇盛),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윤백남(尹白南), 이경손(李慶孫) 등 조선인 조력자의 역할도 무게를 지녔다. 1926년 이후 '조선키네마프로덕션', '덕영(德永)프로덕션' '대륙키네마프로덕션' 그리고 경성촬영소의 '원산(遠山)프로덕션'으로 이어지는 일본인 영화제작사는, 조선 무성영화가 가동한 제작 시스템의 한 축을 제시한다. 핵심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나운규(羅雲奎)와 이창용(李創用)처럼, 조선영화의 작동이 일본인 자본과 기술에 대한 조선영화인의 대응, 경합과 협상과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성영화 전기의 조선영화계는 '영화적인' 영화를 향한 스타일과 실천 방법에 대한 모색의 시기였다. 이는 이구영(李龜永), 윤갑용(尹甲容) 등의 스타일 비평에서 검토될 수 있었다. 조선영화는 영화 매체만의 표현 가능성을 탐구했던 동시기 세계영화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23년에서 1926년까지, 불과 3년간의 조선의 무성영화는 '타블로 쇼트(tableau shot)'로 대변되는 초기 영화적 실천에서 '플래시(瞬間)', '클로즈업' 등 프랑스 인상주의 스타일까지 압축적으로 수용한다.

1926년 12월 11일자 『키네마순보』에 실린 〈아리랑〉 광고를 통해, 조선 무성영화가 서구영화를 수용한 일본 신파영화와 미국 활극영화, 유럽 예술영화 등 서구영화의 여러 경향이 직조된 텍스트임을 살펴보았다. 이 광고에서 '극중극(劇中劇)'으로 제시된 〈카추샤〉는 〈아리랑〉이, 서구영화로부터 영향 받아 독자적인 성격을 구축한 일본영화를 의미하는 신파영화 장르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열사의 춤(熱砂の舞)〉은 〈아리랑〉에 대한, 미국 활극 장르나 유럽 예술사조라는 서구영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는 각각 일본/조선의 신파영화 장르의 양대 속성인 비극성과 활극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선영화와 일본영화의 연동에 대한 고찰은, 1930년대 초중반 일본 스튜디오를 경험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2세대 영화인의 검토로 이어졌다. 그간 한국영화사 기술에서 일본 유학파를 포함한 2세대는 조선 발성영화 장(場)을 주도하며 영화기업화를 도모했지만, 결국 일제 말기 전시체제에 흡수된 것으로 서술되었다. 본고는 이규환(李圭煥), 방한준(方漢駿), 박기채(朴基釆), 신경균(申敬均) 등 대표적인 유학파 영화인들이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일본, 특히 교토의 영화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내용을 복원하였고, 그들의 작업이 조선 무성영화 성숙기부터 맞물려 있음을 살펴보았다.

2세대 유학파들은 일본 영화촬영소에서의 실제 경험과 연출 이론의 습득을 바탕으로 1930년대 초중반 조선영화의 스타일 담론을 주도했다. 그들이 주장한 '콘티뉴이티(continuity)'의 중요성은, 조선 무성영화의 문법으로 인식되고 실천된 몽타주 담론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스튜디오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채, 인력으로 미비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는 조선영화로서는 이들이 최대의 자산이 되었다.

영화문법의 습득과 정착으로 1930년대 중반 조선 무성영화 스타일은 산업 및 기술 환경에 맞춰 나름의 방식으로 안착되었다. 당시 시나리오와 촬영대본은 조선영화가 현대영화와 유사한, 서구의 영화연출용어들이 일본을 통해 번역되어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영화 시나리오에서 확인되는 연출용어들은 조선영화의 문법과 시각적인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조선 무성영화의 시나리오들과 〈청춘의 십자로〉(1934) 필름을 중심으로 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본고는 조선영화가 부분적으로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CHC) 스타일을 차용하고 있지만, 공간의 분석적 접근을 실천하는 할리우드식 데쿠파주(decoupage)보다는 개별 쇼트의 미학을 중시하고 이를 몽타주적 감각으로 연결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조선 무성영화가 나름의 방식으로 '영화적인' 영화의 단계로 진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할리우드 영화, 유럽 예술영화, 일본영화라는 폭넓은 선택지에서 취한 스타일적 결과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노엘 버치(Noël Burch)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균열 노선 영화(The crestline films)'의 다양한 실천태의 영역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특히 일본 무성영화와 비교분석한 결과,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의 균열적 실천에서 공통점이 확인되었다. 발성영화 〈심청〉(1937)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영화의 스타일은 세계영화의 스타일적 경향과 조선영화에 주어진 기술 환경, 산업 논리 그리고 조선관객을 염두에 둔 화법 등 다양한 층위에서 중층적으로 결정되어 구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