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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ABSTRACT 6
제1장 서론 10
제2장 신혜왕후 유씨·정덕왕후 유씨 16
1. 정주유씨가의 성장 17
2. 왕건과 정주유씨가의 혼인 21
3. 태조 즉위 이후 신혜왕후의 정치적 지위 27
4. 정덕왕후의 후손 31
제3장 장화왕후 오씨 36
1. 나주오씨와 해상활동 37
2. 왕건의 나주진출과 장화왕후 42
3. 장화왕후 소생 왕무의 정윤 책봉 49
제4장 신명왕태후 유씨 60
1. 충주지방의 유씨세력 61
2. 태조와 신명왕태후가의 결합 70
3. 혜종 대의 정치 상황과 신명왕태후가 78
제5장 신정왕태후 황보씨 88
1. 황주의 황보씨가문 89
2. 태조와 황주황보씨 94
3. 신정왕태후의 정치적 역할 102
제6장 신성왕태후 김씨 112
1. 신성왕태후의 출신에 관한 제설 113
2. 고려초 김전 세력의 정치적 동향 120
3. 신성왕태후의 자손과 신라 6두품 출신 관료 126
제7장 결론 133
고려 태조의 후비 일람 139
참고문헌 141
국문초록 151
이 글은 고려 太祖 6王后의 세력기반과 정치 활동 등을 분석함으로써, 6왕후의 영향력이 고려 초기 정치상황, 그 중에서도 왕의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를 고찰하였다.
神惠王后는 태조의 제1왕후이다. 그녀의 집안인 貞州柳氏는 정주 포구를 기반으로 해상활동에 종사하였으며 祖父 代에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왕건의 집안도 비슷한 시기에 인근 송악에서 해상활동에 종사했기 때문에 두 집안은 선대부터 교유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혜왕후의 부친 柳天弓은 궁예의 휘하에 있는 왕건의 군사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왕건도 군함을 정비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는 일들을 貞州에서 하였다. 왕건에게 정주가 중요했음에도, 왕건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는 궁예를 의식한 나머지 왕건과 신혜왕후의 혼인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될 수 있었다.
신혜왕후가 제1왕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왕건의 첫 번째 배우자인 점 외에도 신혜왕후를 비롯한 정주유씨가 왕건의 즉위를 적극 도왔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혜왕후의 자녀가 없는 점이 고려되어 같은 정주유씨 가문에서 또 한 명의 태조 배우자를 맞았는데, 그가 貞德王后이다. 정덕왕후는 성종의 외조모인데, 충주 신명왕태후 유씨·황주 신정왕태후 황보씨 등과 연대하였다.
莊和王后는 惠宗의 母后이다. 그녀의 집안인 羅州吳氏는 나주의 榮山浦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해상세력이다. 淸海津의 세력권에서 활동하다 9세기 중엽 청해진의 혁파를 계기로 조부 富돈 대에는 독자적인 해상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나주오씨와 왕건 가문은 비슷한 시기에 서해에서 해상활동을 하며 연관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
왕건은 903년에 나주를 경략하였다. 견훤도 취하지 못할 만큼 강성하였던 나주지역을 왕건이 일시에 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莊和王后家로 대표되는 나주호족과의 사전 교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장화왕후가는 왕건의 나주경략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이것이 혼인으로 연결되었다. 왕건은 즉위하기까지 상당 기간을 나주에 머물며 궁예의 견제를 피하는 등 나주는 왕건의 중요한 세력기반이 되었다. 장화왕후는 아들 王武(혜종)가 태조의 후계자인 正胤으로 책봉될 수 있도록, 박술희와 최지몽을 선택하여 武의 정윤 책봉을 후원하게 하였다. 이들은 나주오씨와 가까운 해상세력이었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왕무는 정윤으로 책봉될 수 있었다. 나주오씨가에서 태조의 후계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莊和王后家는 끝까지 왕건의 세력배경이 되어줬고 후백제 멸망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神明王太后는 定宗·光宗의 모후이다. 그녀의 집안인 忠州劉氏는 충주의 토착세력가 출신으로 세력 근거지는 충주의 大原縣이다. 신라 말에 충주의 대표적 浦인 金遷浦를 장악하여 중부 내륙의 물류유통을 주도함으로써 크게 성장하였다. 충주유씨가 장악한 南漢江 내륙 수운은 왕건가의 해상무역과도 연결됨으로써 두 집안은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것이 혼인으로 이어졌다.
혜종 대 중주유씨는 패서세력을 주류로 하는 지지 세력을 결집시켜 혜종을 제거하고 정종을 즉위시켰다. 이들의 결집 배경은 高句麗系라는 명분이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고구려 계통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혜종 이후 즉위한 목종까지 忠州劉氏家 및 黃州皇甫氏家의 성원이었다. 충주유씨와 황주황보씨가 결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이 패서세력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도 역시 고구려 계승이념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神靜王太后는 景宗·成宗의 祖母이다. 그녀는 黃州皇甫氏 출신으로, 이 집안은 浿江鎭의 軍官을 지휘하는 과정에서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평양경영에는 개경과 평양을 오가는 길목을 장악할 수 있었던 황주황보씨의 협력이 중요했으며, 이것이 태조와의 혼인으로 이어졌다. 신정왕태후의 후손이 왕위계승을 주도하게 되면서, 그녀의 호칭은 거듭 승격되었으며 태조의 廟室에 부祭되기에 이른다.
神成王太后는 顯宗의 조모이다. 그녀는 敬順王 金傅의 伯父 金億廉의 딸로, 신라의 투항을 계기로 태조와 혼인하였다. 神成王太后와 그 자식 安宗 王郁의 정치적 힘은 미약했고 불안했다. 신라의 부활 가능성을 우려하는 정치세력의 경계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안종 욱을 후원한 신라 6두품 출신 관료의 세력은 최승로의 사망을 계기로 약화되었다. 반면 안종 욱을 견제하는 황보씨 세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안종 욱은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成宗의 누이이자 경종 妃였던 헌정왕후 황보씨에 접근하여 大良院君 王詢을 낳았다. 대량원군 왕순은 황보씨 세력에 불만을 품고 목종을 몰아낸 신라 6두품 출신 관료를 비롯한 유학자 출신 관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후 고려의 왕위는 현종의 자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아울러 6왕후의 자손들 간의 왕위계승분쟁은 끝이 났으며 6왕후의 영향력도 더 이상 미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현종 대부터는 이전의 목종 대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가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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