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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국문초록 14
제1장 서론 18
제2장 공자의 시각화 방식과 진상(眞像)의 전통 21
제1절 공자의 시각화 방식 22
제2절 진상(眞像)의 전통 30
제3장 공자도상의 봉안과 숭배 39
제1절 성상에서 우상으로: 문묘의 공자도상 봉안과 파괴 40
제2절 우상에서 성상으로: 구산서원의 공자도상 봉안과 공인 51
제4장 조선시대 공자도상과 영당 61
제1절 관동·관북지역의 서원과 공자도상 62
1. 서원설립의 잠재적 권력 63
2. 만들어진 문향(文鄕)의 표상 70
3. 행단도: 유가적 즐거움의 시각화 76
제2절 소수서원의 공자도상 90
1.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성리학 동전(東傳)의 기념물 90
2. 공자좌상: 은일자로서의 공자 98
제3절 노성·화성궐리사의 공자도상 102
1. 노성궐리사의 공자도상: 유배된 우상 103
2. 화성궐리사의 공자도상: 성상의 탄생 112
제4절 영양사·사산사의 공자도상 118
1. 영양사의 공자도상: 존화양이(尊華攘夷)의 표상 119
2. 사산사의 공자도상: 이모(移摹)를 통한 권위의 복제 122
제5장 결론 130
참고문헌 132
도판 140
Abstract 161
도1. 〈공자견노자(孔子見老子)〉 화상석, 석각탑본, 동한(東漢), 크기 미상, 원작품은... 140
도2. 〈공자소상(孔子塑像)〉, 1730년, 진흙소조 추정, 크기 미상, 곡부 공묘(孔廟)... 140
도3. 『신간소왕사기』 〈노사구상(魯司寇像)〉, 1264-1294년, 목판인쇄, 크기 미상,... 140
도4. 〈노사구상(魯司寇像)〉, 송대(宋代) 추정, 석각탑본, 173x73㎝, 곡부 공묘(孔... 140
도5. 『찬도호주예기(纂圖互注禮記)』 〈현단관면제도(玄端冠是制圖)〉,... 141
도6. 〈한고사로(漢高祀魯)〉 《성적도(聖蹟圖)》, 1444년, 목판인쇄, 28x56㎝, 중국국가도서관 소장. 141
도7. 〈인토옥서(麟吐玉書)〉 《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성궐리사 소장. 141
도8. 〈서수획린(西狩獲麟)〉 《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성궐리사 소장. 141
도9. 『삼교수신대전(三敎搜神大全)』 〈공자 및 사성(四聖)〉, 14세기, 목판인쇄, 크기 미... 142
도10. 『삼대만용정종(三台萬用正宗)』, 〈지성공선니행단설교(至聖孔宣尼杏壇說敎)〉,... 142
도11. 〈소영(小影)〉, 1095년, 비석탑본, 125x67㎝, 비석은 곡부 공묘(孔廟) 성적전... 142
도12. 〈소영(小影)〉, 1118년, 비석탑본, 72x42㎝, 비석은 곡부 공묘(孔廟) 성적전... 142
도13. 〈선성소상(先聖小像)〉 《성적도(聖蹟圖)》, 1444년, 목판인쇄, 28x56㎝, 중국국가도서관 소장. 143
도14. 〈선성유상(先聖遺像)〉, 16세기 초, 비석탑본, 크기 미상, 비... 143
도15. 〈선성유상(宣聖遺像)〉, 16세기 추정, 비석탑본, 크기 미... 143
도16. 채용신, 〈선사공자행교상(先師孔子行敎像)〉, 20세기 초,... 143
도17. 〈행단예악(杏壇禮樂)〉 《성적도(聖蹟圖)》, 1742년, 지본담채, 33x5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4
도18. 김홍도(金弘道),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부분, 1778년, 지본담채, 122.7x287.4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4
도19. 우구(尤求), 〈품고도(品古圖)〉, 명대(明代), 지본수묵, 93.1x31.1㎝,... 144
도20. 〈행단도(杏壇圖)〉, 명대, 견본채색, 106
도21. 성의(誠意), 〈행단도(杏壇圖)〉, 16세기, 견본채색, 104.5
도22. 나능호(羅能浩), 〈행단도(杏壇圖)〉, 1886년, 지본채색, 105x159㎝, 신화수 소장. 146
도23. 정선(鄭敾), 〈행단고슬도(杏壇鼓瑟圖)〉, 18세기, 견본채색, 23.3x29.6㎝, 왜관수... 147
도24. 정선(鄭敾), 〈부자도(夫子圖)〉, 18세기, 견본담채, 31x22㎝, 개인 소장. 147
도25. 조영석(趙榮祐), 〈행단도(杏壇圖)〉, 18세기, 선면수묵, 79.5x27.5㎝, 개인소장. 147
도26. 양기성(梁箕星), 〈증점욕기(曾點浴折)〉 《만고기관(萬古奇觀)》... 148
도27. 이명기(李命基), 〈풍호무우도(風乎舞零... 148
도28. 傳 김홍도(金弘道), 〈야유도(野遊圖)〉,... 148
도29. 윤덕희(尹德熙), 〈무우도(舞霉圖)〉 《연옹화첩(蓮翁畵帖)》, 18세기, 견본수묵,... 148
도30. 윤용(尹용), 〈고사관폭도(高士觀瀑圖)〉, 18세기, 지본수묵, 28x22.1㎝, 간송... 148
도31. 김건종(金建宗),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1816년 이모, 견,... 149
도32-1.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유지초본 유리건판사진, 19... 150
도32-2.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유지초본 유리건판사진, 19... 150
도33.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유지초본, 크기 미상, 소수박... 150
도34. 〈이보살비상(二菩薩碑像)〉뒷면 부분, 6세기, 120.6x61.6-64.3㎝,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 150
도35. 〈문인(門人)〉 《맹씨가전조도(孟氏家傳祖圖)》, 1212년, 석각탑본, 181x79㎝,... 151
도36. 〈서하역경도(西夏譯經圖)〉 『현재현겁천불명경(現在賢劫千佛名經)』, 원대(元... 151
도37. 〈공자좌상(孔子坐像)〉원본 유리건판사진, 1927-1935년 촬영. 151
도38. 〈공자좌(孔子坐像)〉초본 유리건판사진, 1927-1935년 촬영. 151
도39. 〈공자좌상(孔子坐像)〉, 16세기 추정, 석각탑본 추정, 167.5x79.3㎝, 국학진흥원 소장. 152
도40. 〈공자강학도〉, 명대, 견본채색, 167.5x85㎝, 산동성 공자박물관 소장. 153
도41. 〈공자좌상(孔子坐像) 및 송조문인상(宋朝文人像)〉, 연대 미상, 지본선묘 및... 153
도41-1. 〈송조문인상(宋朝文人像)〉 세부 153
도42. 〈공자사구상(孔子司寇像)〉, 1912년 또는 1916년에 이모한 것... 154
도43. 〈공자초상(孔子肖像)〉, 19세기, 견본채색, 28.5x12㎝,... 154
도44. 윤두서(尹斗緖), 〈공자상(孔子像)〉, 1706년, 견분수묵,... 154
도45. 〈선성상(先聖像)〉『삼재도회(三才圖給)』, 1609년, 목판인쇄, 크기 미상. 154
도46. 〈공자상孔子像)〉『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 목각탑본, 1584년, 31.5x23㎝,... 154
도47.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 〈성상(聖像)〉, 1839년, 목판인쇄, 24.5x18㎝, 유홍준 소장. 155
도48.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 〈선사행상(先師行像)〉,1839년, 목판인쇄, 24.5x18㎝,... 155
도49. 〈시서예악(詩書禮樂)〉《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성... 156
도50. 〈사자시좌(四者侍坐)〉《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 156
도51. 〈성문사과(聖門四科)〉《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성... 156
도52. 〈금인명배(金人銘背)〉《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 156
도53. 〈관주명당(觀周明堂)〉《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성... 156
도54. 〈인번거노(因燔去魯)〉《성적도(聖蹟圖)》, 1912년, 목판인쇄, 28x51㎝, 화... 156
도55-1. 채용신(蔡龍臣), 〈공자상(孔子像)〉, 20세기 초, 크기 미상, 영양사 舊藏, 원본은... 157
도55-2. 채용신(蔡龍臣), 〈기자상(實구像)〉, 20세기 초, 크기 미상, 영양사 舊藏, 원본은... 157
도55-3. 채용신(蔡龍臣), 〈맹자상(孟子像)〉, 20세기 초, 크기 미상, 영양사 舊藏, 원본은... 157
도55-4. 채용신(蔡龍臣), 〈주자상(朱子像)〉, 20세기 초, 크기 미상, 영양사 舊藏, 원본은... 157
도55-5. 채용신(蔡龍臣), 〈안자상(顔子像)〉, 20세기 초, 크... 158
도55-6. 채용신(蔡龍臣), 〈증자상(曾子像)〉, 20세기 초, 크... 158
도55-7. 채용신(蔡龍臣), 〈자사상(子思像)〉, 20세기 초, 크... 158
도55-8. 채용신(蔡龍臣), 〈소강절상(邵康節像)〉, 20... 158
도55-9. 채용신(蔡龍臣), 〈주염계상(周염溪像)〉, 20... 158
도55-10. 채용신(蔡龍臣), 〈장횡거상(張橫渠像)〉, 20... 158
도55-11. 채용신(蔡龍臣), 〈정명도상(程明道像)〉, 20... 158
도55-12. 채용신(蔡龍臣), 〈정이천상(程伊川像)〉, 20... 158
도56. 채용신(蔡龍臣), 〈대성지성공부자진상〉, 1910년대, 견본채색, 101.7x65.2㎝,... 159
도57. 〈문선왕상(文宣王像)〉, 1910년, 견본채색, 110x66.5㎝, 사산사 소장. 159
도58-1. 〈안자상(顔子像)〉, 1910년, 채색, 크기 미상,... 159
도58-2. 〈증자상(曾子像)〉, 1910년, 채색, 크기 미상, 사... 159
도58-3. 〈자사상(子思像)〉, 1910년, 채색, 크기 미상, 사... 159
도58-4. 〈맹자상(孟子像)〉, 1910년, 채색, 크기 미상, 사산사 舊藏, 원본은 일실되고... 160
도58-5. 〈주자상(朱子像)〉, 1910년, 채색, 크기 미상, 사산사 舊藏, 원본은 일실되고... 160
도59-1. 『곡부성묘위안사실기』에 실린 연성공과 위문사절단이 함께 찍은 사진. 160
도59-2. 『곡부성묘위안사실기』에 실린 곡부 공묘 대성전의 공자소상 사진. 160
삽도1. 무량사(武梁祠) 화상석 및 동평(東平) 한묘(漢墓) 벽화의 〈공자견노자(孔子見老子〉 도상 32
삽도2. 명·청시기에 제작된 〈선성유상(先聖遺像)〉 계열 공자도상 35
삽도3. 『법화경변상도』, 〈행단도〉, 〈부자행단지도〉의 도상비교 78
삽도4. 도연명과 증점의 도상비교 84
삽도5.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공자얼굴부분과 〈호리건곤도〉 인물 얼굴부분 비교 96
삽도6. 〈공자좌상〉, 〈공자강학도〉, 〈공자지제(孔子之制)〉 《송인화역대금식도》 도상 비교 100
삽도7. 〈공자좌상〉, 〈공자강학도〉 부분 비교 100
삽도8. 홀(笏)을 들고 서있는 공자사구상 109
삽도9. 선성유상(C계열)과 공부자유상(D계열) 비교 111
삽도10. 『동국궐리지』의 공자도상과 《성적도》의 공자도상 비교 116
삽도11. 『삼재도회』에 수록된 도상과 영양사에 봉안된 도상 비교 120
삽도12. 채용신의 사산사 〈공자상〉, 〈박만환 초상〉, 〈전우 초상〉 비교 121
본 논문은 조선시대에 제작되거나 유입된 공자의 시각적 이미지 가운데, 제례와 첨배의 용도로 제의시설에 봉안되었던 공자도상(孔子圖像)에 대한 연구다.
공자도상이 제작되거나 유입되는 일차적 목적은 제의시설에 봉안하여 의례를 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교의 종교성에 대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역대로 문묘(文廟)나 영당(影堂)에서 제의의 대상이자 도구로 사용되어 일정한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고, 특정시대와 지역, 집단의 사상과 이익추구에 따라 성상(聖像)으로 존숭되거나 우상(偶像)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에 제작되거나 유입된 공자도상의 도상분석과 더불어, 제례와 숭배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던 공자도상이 종교적, 사회적 측면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조선시대 시각문화의 한 부분을 형성했는지 조명해 보았다. 우선 사상과 문화사적 변동에 따라, 성상 또는 우상으로 변모하는 공자도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로써 이미지를 통한 공자숭배문화를 연대기적으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세워진 주요 공자영당과 그 곳에 봉안된 공자도상을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봉안처의 성격에 따라 정치·종교·사회적 관점에서 다각도로 고찰해보았다.
8세기부터 고려 말까지는 제의공간에서 공자의 형상이 성상으로 존숭되었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공자의 형상은 제의공간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성리학적 이념을 내세운 조선에서는 제의공간에 설상(設像)하는 것을 이단(異端)의 폐습으로 여겼고, 또한 신주(神主)를 사용해야 한다는 성리학적 제의관으로 인해 공자의 형상을 우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530년 명(明)에서 문묘의 공자상 훼철을 조칙으로 삼은 '가정개제(嘉靖改制)'가 단행됨에 따라, 조선에서도 1574년 개성문묘의 공자소상이 훼철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문묘에서 공자상이 사라지게 된다.
필자는 이와 같이 공자의 형상을 금기시하는 역사적 흐름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공자도상을 봉안한 서원이 설립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16세기 서원설립운동이 전개되면서 1555년 강릉에서는 공자를 향사하는 구산서원(丘山書院)이 설립된다. 강릉지역에서는 향사할만한 지역의 선유(先儒)가 없었기 때문에 서원설립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였고, 이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공자도상을 명분으로 공자를 향사하는 서원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상(像)에 대한 제사를 금기하는 성리학적 제의관에 저촉되고, 향교의 문묘와 공자의 제사가 겹친다는 문제가 발생하여 서원설립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에 서원설립주체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상에 대한 예식을 조두(俎豆)에서 분향(焚香)으로 바꾸어 공자도상을 봉안하는 정당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구산서원의 공자도상 봉안을 기점으로 이미지를 통한 공자의 숭배는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강릉과 비슷한 인문·지리적 환경을 가진 관북(關北)지역에서는 구산서원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본받아 공자도상을 서원설립의 도구로 이용하였으며, 더불어 봉안한 공자도상을 '문향(文鄕)'의 표상으로 전설화시켰다는 것을 나능호(羅能浩)가 그린 〈행단도(杏壇圖)〉의 제기(題記)를 통해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 〈행단도〉가 풍류(風流)와 호학(好學)의 유가적 즐거움을 시각화했다는 것을 도상학적으로 고찰하여, 그 주제와 상징이 서원이라는 강학공간이 지향하는 바와 합목적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문묘를 시각적으로 번안하고 공자를 제왕의 모습으로 표현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가 소장되어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그림의 내력이 소수서원의 상징성과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윤색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그림은 예로부터 안향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올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전승되어, 그가 주자성리학을 동방에 전파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일종의 역사적 기념물로서 추숭되었다. 그러나 그림의 형식적 분석결과, 이 그림이 안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소수서원은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한 안향을 주향으로 삼은 곳이며, 조선 최초의 사액 서원이라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를 안향과 관련지어 동방 유학의 시작과 창달을 상징하는 가시적 징표로 윤색한 것으로 보인다.
노성궐리사(魯城闕里祠)와 화성궐리사(華城闕里祠)는 공자도상을 봉안한 가장 대표적인 영당으로 두 곳 모두 정조(正祖)와 관련이 깊다. 이에 두 궐리사에 봉안되었던 공자도상에 대해 고찰하고 '정조의 눈'을 통해 당시의 공자도상에 대한 인식과 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노성궐리사에 봉안된 대부분의 공자도상은 정조의 명으로 다른 지역에서 이안(移安)된 것이다. 당시 전국 곳곳에서 공자도상 및 여러 성현의 도상을 빌미로 영당을 남설(濫設)하였는데, 정조는 조정의 허락 없이 사당을 짓는 것은 사체(事體)에 부적합하다고 여겨 그곳의 공자도상들을 노성궐리사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공자도상이 근원적으로 공자의 실제모습을 담을 수 없다는 부정적 관점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은 공자도상 이안의 주요 동인을 작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정조는 공자도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성에 궐리사를 세워 내각(內閣)에 있던 공자영정을 봉안하고, 조선의 공자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그 이유는 정조가 화성 육성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과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화성에 궐리사를 세워 유교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어 성소(聖所)의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정조의 공자도상에 대한 인식과 이용은 정치적 상황과 목적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노성궐리사에는 다수의 공자도상이 현전하여 18세기 무렵에 유행하였던 공자상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지만, 화성궐리사에는 설립당시에 봉안했던 그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따르면 『동국궐리지(東國闕里誌)』에 실린 공자도상이 설립당시에 봉안된 도상을 옮긴 것이라고 전하지만, 이 그림들은 『성적도(聖蹟圖)』에 실린 공자의 형상을 차용한 것이며, 당시에 봉안된 공자도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말기에는 일본의 침탈과 서구열강의 침입, 이단으로 간주되던 천주교의 전파로 인해, 공자도상이 춘추대의(春秋大義)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이용되었다. 정읍의 영양사(瀛陽祠)는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건립된 공자영당으로, 이곳에 봉안된 공자도상은 항일의병장과 우국지사들의 초상을 다수 그린 채용신(蔡龍臣)이 제작한 것으로 전한다. 이전의 공자도상들은 화보(畵譜)나 중국의 공자도상을 그대로 옮기는데 충실했지만, 이 그림에서는 기존 도상의 영향 없이 채용신 고유의 화풍이 여실히 반영되어있다. 전통적인 좌우칠분면(左右七分面)의 인물표현방식에서 탈피하여, 채용신 자신이 즐겨 사용하던 정면관 형식으로 공자를 표현하였고, 서구식음영법이 가미되어 있다. 그리고 범본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채용신 자신이 오랜 기간 체화한 얼굴표현 방식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공자의 얼굴이 조선적으로 변모하였다.
사산사(泗山祠) 또한 공자를 존화양이의 표상으로서 향사하기 위해 영양사의 공자도상을 이모하여 봉안했다. 그리고 이후 네 차례나 다른 영당의 공자도상을 이안하거나 이모해 온다. 『동국궐리지』에 실린 도상과 일치하면서 동시에 중국 곡부의 진본으로 여겨지던 도상을 이모해왔고, 노성궐리사에 봉안되었던 공자도상을 이모해 왔다. 그리고 공묘(孔廟) 대성전(大成殿)에 봉안된 공자 조각상의 사진을 범본으로 삼아, 채용신에게 영정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권위적 도상을 봉안하여 영당의 권위를 높이고, 그 존립기반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의 도상은 언제나 그 진위에 대한 시비가 들끓었고, 이는 영당의 존립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공자의 진상(眞像)으로 인정되었던 도상이나 궐리사와 같은 권위있는 영당에 봉안된 공자도상을 봉안한 것은, 도상의 진위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영당존립의 정당성을 대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사산사에서 이루어진 공자도상의 이모는 '권위의 복제'이며 영당존립을 위한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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