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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국문 초록

목차

I. 머리말 10

II. 왕희지 고사도의 연원 15

1. 왕희지 생애 및 고사 15

1) 왕희지의 생애 15

2) 왕희지의 서예 관련 일화들 17

2. 중국 왕희지 고사도 제작 양상 20

1) 왕희지애아도 21

2) 난정수계도 28

3) 우군서선도 31

III. 조선 중기 이전 왕희지 고사도 34

1. 왕희지 서체 및 고사 수용 34

2. 문헌으로 전하는 왕희지 고사도 39

IV. 조선 중·후기 왕희지 고사도 45

1. 조선 중·후기 왕희지 고사도 제작 배경 45

1) 조선 중기의 왕희지 고사 및 고사도 인식 확대 45

2) 18세기 초 왕희지체의 주목 51

2. 조선 중·후기 왕희지 고사도 작품분석 54

1) 왕희지애아도 : 관아도에서 환아도로의 이행 54

2) 난정수계도 : 왕희지상의 역할 61

3) 심사정 〈우군제선도〉 : 부채 노인 고사의 표현 70

V. 조선 말기 왕희지 고사도 75

1. 조선 말기 왕희지 고사도 제작 배경 75

1) 왕희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지속 75

2) 고사도 제작 경향 속 왕희지 고사도 78

2. 조선 말기 왕희지애아도의 복합적인 양상 84

1) 왕희지관아도 : 배경 속 난정의 삽입 85

2) 왕희지환아도 : 매체별 도상의 다양성 88

VI. 맺음말 97

참고문헌 101

부록 111

도판 117

Abstract 136

圖 1. 傳 王羲之, 《快雪時晴帖》冊(부분), 紙本水墨, 32.1x34.7, 臺北故宮博物院 117

圖 2. 《喪亂帖》, 唐, 紙本墨書, 26.2x58.4, 日本皇室 117

圖 3. 《三才圖會》 王逸少像 118

圖 4. 《晩笑堂竹莊畵傳》王右軍像 118

圖 5. 馬遠, 〈王羲之玩鵝圖〉, 南宋, 絹本彩色,... 118

圖 6. 錢選, 〈王羲之觀鵝圖〉 (부분), 1295년, 紙本彩色전체 27.9x1063.8cm, 화면 23.2 x 92.7... 118

圖 7. 任頣, 〈羲之愛鵝圖〉, 1890년, 紙本彩色,... 119

圖 8. 任頣, 〈羲之愛鵝圖〉, 19세기 말, 紙本彩色, 133x63cm, 中國美術館 119

圖 9. 任頣, 〈羲之觀鵝圖〉, 1881년, 紙本彩色,... 119

圖 10. 杜菫, 《古賢詩意圖》 (부분), 明, 紙本水墨, 28x1079.5cm, 北京故宮博物院 119

圖 11. 미상, 〈Wang Xizhi Watching Geese〉, 19세기, 絹本彩色, 30.8x31cm, 필라델피... 120

圖 12. 陳洪綬, 〈羲之籠鵝圖〉, 明, 絹本彩色, 103.1x47... 120

圖 13. 陳洪綬, 〈羲之籠鵝圖〉, 明, 絹本彩色, 109.5x50... 120

圖 14. 傳 郭忠恕, 〈顧愷之蘭亭讌集圖〉 (부분), 宋, 絹本彩色, 23.5x711.8cm, 北京故宮博物院 121

圖 15. 〈明拓明益王重刻大蘭亭圖〉(부분), 1592년, 墨紙, 32.1x1675.0cm, 北京故宮博物院 121

圖 16. 〈明拓明益王重刻小蘭亭圖〉(부분), 1602년, 墨紙, 22.4x522.0cm, 北京故宮博物院 121

圖 17. 樊沂, 〈蘭亭修禊圖卷〉(부분), 1671년, 絹本彩色, 28.1x392.8cm, 클리블랜드미술관 121

圖 18. 祝允明, 文徵明, 〈蘭亭序書畫卷〉, 1532년, 紙本彩色, 20.8x77.8cm, 遼寧省博物館 122

圖 19. 文徵明, 〈亭流觴圖〉, 1542년, 紙本彩色, 24.2x60.1cm, 北京故宮博物院 122

圖 20. 文伯仁, 〈蘭亭修禊圖〉, 明, 扇面, 紙本彩色, 貴州省博物館 122

圖 21. 仇英, 〈蘭亭修禊圖〉, 明, 紙本水墨, 99.3x398cm, 臺北故宮博物院 123

圖 22. 周臣, 〈人物古事 八開〉 중 1면, 明, 紙本彩色, 33.7x64.5cm, 北京故宮博物院 123

圖 23. 仇英, 〈右軍書 故宮博物院扇圖〉, 明, 紙本彩色,... 124

圖 24. 仇英, 〈右軍書扇圖〉, 明, 絹本彩色, 145x74cm, 雲南省博物館 124

圖 25. 〈右軍書扇圖〉, 明, 絹本彩色, 136x78cm, 北京 故宮博物院 124

圖 26. 黃增, 《人物畵》 중 4폭, 淸, 紙本彩色, 33.5x49cm, 臺北故宮博物院 124

圖 27. 湯琦, 〈自描人物圖〉 중 4폭, 淸, 紙本水墨, 29.7x31.6cm, 영국박물관 125

圖 28. 《高士人物圖》 27점중 제12폭, 17세기, 絹本彩色, 20.6x21.5cm, 국립중앙박물관 125

圖 29. 《故事人物圖》 18점 중 제1폭, 17세기, 絹本彩色, 각... 125

圖 30. 鄭歚, 《山水圖》 8첩 중 2폭, 17세기말-18세기, 絹本水墨,... 126

圖 31. 金弘道, 〈黃庭換鵝圖〉, 18세기-19세기 초, 紙... 126

圖 32. 金弘道, 〈西園雅集圖〉, 18-19세기, 絹本彩色, 47.9x122.7cm, 국립중앙박물관 126

圖 33. 金宗繪, 〈黃庭換鵝圖〉, 18세기, 紙本淡彩, 32.6x41cm, 선문대학교 박물관 127

圖 34-1. 傳 洪得龜, 〈孤山放鶴圖〉, 17세기, 絹本... 127

圖 34-2. 尹德熙, 〈西湖放鶴圖〉, 17-18세기, 絹本水墨,... 127

圖 35. 미상, 〈蘭亭修禊圖〉, 《耆老宴詩畵帖》, 1599년,... 127

圖 36. 미상, 〈景宗辛丑親定契屛〉 10폭, 1721년, 絹本彩色, 각 142x61cm, 개인소장 128

圖 37. 傳 趙泰億, 《曲水圖》 8폭, 18세기 경, 紙本彩色, 각 122.6x60.9cm, 국립중앙박물관 128

圖 38-1. 미상, 尹得和 本, 〈蘭亭圖〉, 《千古最盛帖》, 17세기말-18세기초, 絹本彩色,... 128

圖 38-2. 傳 趙涑 本, 〈蘭亭圖〉, 《千古最盛帖》, 18세기 초, 絹本彩色, 33x23cm, 국립중앙박물관 128

圖 38-3. 미상, 〈蘭亭修禊圖〉, 《千古最盛帖》, 1670년, 紙本彩色, 27x30.7cm, 선문대학교 박물관 129

圖 38-4. 미상, 〈蘭亭圖〉, 《千古最盛帖》, 19세기,... 129

圖 39. 미상, 〈蘭亭修禊圖〉, 조선 말기, 紙本淡彩, 35.5x310cm, 국립민속박물관 129

圖 40. 沈師正, 〈右軍題扇圖〉, 18세기, 紙本淡彩, 21.2x28.5cm, 국립중앙박물관 129

圖 41. 《夢幻居畫學簡明》 卷 2 〈黃庭換白鵝〉 130

圖 42. 仇英, 《點石齋叢畵》, 卷 3 130

圖 43. 《詩中畵》 卷 下 13 130

圖 44-1. 《馬駘畫寶》 〈羲之飼鵝〉 131

圖 44-2. 《三希堂畵譜》 〈右軍籠鵝〉 131

圖 45. 《芥子園畵傳》 (부분) 131

圖 46. 張承業, 〈王羲之觀鵝圖〉, 19세... 132

圖 47. 《詩中畵》 卷 上 132

圖 48. 張承業, 〈王羲之觀鵝圖〉,... 132

圖 49. 趙錫晋, 〈王羲之像〉, 20세기 초, 紙本水墨, 54x25cm, 개인소장 133

圖 50. 張承業, 〈王羲之得鵝圖〉, 《人物 翎... 133

圖 51. 趙錫晋, 《故事圖》 10폭 병풍 〈黃庭換... 133

圖 52. 趙錫晋, 《中國故事圖》 10폭 중... 134

圖 53. 미상, 《故事人物圖》 6폭 중 4폭, 19세기... 134

圖 53-1. 미상, 《故事人物圖》, 19세기 말, 絹本刺繡, 97x29cm, 한국민화박물관 134

圖 54. 李漢喆, 〈黃庭換鵝圖〉, 19세기, 紙本彩色, 9x21.3cm, 간송미술관 134

圖 55. 張承業, 〈仙人畫筆圖〉, 19세기 말, 紙本淡彩, 92.7x140cm, 국립중앙박물관 135

圖 56. 미상, 〈故事人物圖〉, 조선 말, 紙本彩色,... 135

초록보기

본 연구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王羲之(303-361) 고사도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원인을 왕희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 문헌과 연관지어 이해하고, 조선시대 왕희지 고사도의 제작양상과 그림에 드러난 왕희지의 이미지 변화를 조망하는 시도이다. 조선 중기에 왕희지의 성품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것과 더불어 18세기 초에 조선에서 왕희지체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은거자로 묘사되던 왕희지가 중·후기에 들어 높은 위상을 지닌 서예가의 면모가 부각되어 고사도에 묘사되기 시작했고, 말기에는 거위를 애호하는 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왕희지는 東晉 시대 서예가로, 당시 정돈되지 않던 서체를 완성하여 현재까지 書聖으로 평가된다. 왕희지 고사도는 王羲之愛鵝圖, 蘭亭修禊圖, 右軍書扇圖가 제작되었는데, 중국에서 가장 이른 작품은 宋에서 제작되었으며, 淸까지 제작례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조선 중기 이전에 제작된 왕희지 고사도는 문헌으로만 전해지며, 환아 고사를 통해 왕희지의 은거 이미지를 부각하고, 세 그림 중에서 난정수계도만이 제작례로 언급된다.

조선 초기에 왕희지의 품행이 부족하고 글씨를 잘 쓰는 것은 기예에 지나치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이와 반대로 조선 중기에는 왕희지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면서, 왕희지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들어서 왕희지체가 서체의 원형으로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왕희지의 서예와 관련된 고사도의 제작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와 후기에 제작된 왕희지 고사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화제, 왕희지애아도, 난정수계도, 우군서선도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 제작된 그림에는 왕희지가 높은 위상을 지닌 서예가로 부각된다. 먼저 왕희지애아도는 18세기 중반까지는 왕희지관아도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18세기 중반 이후로는 왕희지환아도가 제작되었다. 왕희지체의 유행에 따른 것으로, 환아도에서 왕희지가 직접 글씨를 쓰는 도상이 나타나며, 서예가의 모습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두 번째로 난정수계도는 왕희지상이 묘사된 작품과 생략된 작품으로 나누어 나타나는데, 왕희지상이 묘사된 작품은 이전의 왕희지의 은거자적 이미지가 강조된 특징이 이어진다. 이와 달리 왕희지상이 생략된 난정수계도는 耆老宴, 進宴, 親政 등 궁중행사를 묘사한 그림이다. 왕희지의 자리를 임금의 자리로 상정하였고, 왕희지를 임금처럼 모임을 주도하는 자로 묘사하여, 높은 위상을 가진 인물로 그려냈다. 마지막으로 조선에서 제작된 우군서선도는 沈師正(1707-1769)의 작품이 유일하며, 姜世晃(1713-1791)과의 교유를 통해 그림에 왕희지를 높은 위상을 지닌 서예가로 나타냈다. 화려한 다리의 배경 표현과 글쓰는 모습의 묘사, 상하 관계를 드러내는 인물의 구도, 그리고 시종 세 명의 등장이 심사정이 왕희지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말기의 왕희지 고사도는 왕희지애아도만이 제작된다. 조선 말기 왕희지에 대한 인식은 조선 후기와 변함없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는데, 조선 말기의 고사도 제작양상은 매체와 도상에서 이전과 차이점을 보인다. 조선 말기에는 서화 시장의 발달과 함께 병풍이 다수 제작되었으며, 특히 고사도에서는 雜歌의 유행으로, 여러 고사를 한 번에 인식하여 이를 병풍에 조합적으로 표현하였다. 도상적으로는 淸대 화보의 전래로 인해, 화보에 나타난 도상이 반복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 말기의 왕희지애아도는 왕희지관아도와 왕희지환아도로 나누어져서 제작된다. 이 시기에는 고사도에 왕희지가 거위를 애호하는 문인으로 묘사되었다. 먼저 왕희지관아도에서는 배경으로 정자가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난정수계 고사의 난정을 나타낸다. 정자가 배경으로 결합되는 데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잡가의 조합적인 경향과 《詩中畵》에 나타난 부채 노인과의 일화와 거위를 가져오는 일화가 합쳐져서 나타나는 도상에서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왕희지환아도는 병풍과 이외의 개별 화면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으며, 병풍에서는 도상의 반복이 드러나고, 개별 화면의 작품에서는 같은 화제임에도 다양한 도상이 드러난다. 도상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중국의 왕희지환아도와 달리 거위를 데려가는 鳥籠이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조롱을 사치품으로 여기던 경향과 연관지어 묘사하지 않은 것이라 여겨진다.

이로써 본 연구는 조선시대 왕희지 고사도가 제작된 사회적 원인을 살펴보고, 고사도 속에서 왕희지가 어떻게 묘사되고, 시기에 따라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고찰해보았다. 그동안 왕희지 고사도는 이를 그린 작가를 언급할 때에 하나의 제작례로써 소개되었을 뿐 하나의 흐름으로 제작양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왕희지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른 변화가 뚜렷하고, 이가 고사도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본 논문에서는 조선시대 왕희지 고사도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원인을 파악했으며, 제작양상과 시기에 따른 왕희지의 이미지 변화를 다각적으로 검토해보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