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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한국어 초록 8

머리말 12

1. 루트피 파샤의 삶과 경력 20

2. 무잣디드=술탄: 신이 세계의 지배권을 위탁한 군주 36

3. 칼리프=무잣디드=술탄: 세계를 정의롭게 다스릴 신의 대리인 60

맺음말 80

참고문헌 86

Abstract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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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16세기 오스만 왕조의 군주권이 튀르크 · 몽골 전통의 통치정당화 원리도 반영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의 제도에 대해서는 사파비 제국 · 무굴 제국 등과 함께 페르시아 · 이슬람 세계라는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의 대재상 루트피 파샤의 저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실제 오스만 제국의 군주관에는 몽골 제국 이래 페르시아풍 세계에 도입된 중앙유라시아 목축민들의 관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은 전국에 대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실현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국이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서쪽 지중해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동쪽 아제르바이잔 · 이라크에서는 사파비 제국과, 인도양에서는 포르투갈과 대치중이었다.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룩하고 이웃한 제국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를 지지할 통치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 시기 오스만 왕조는 지역 강국의 수준을 넘어 세계 제국의 면모에 걸맞는 이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쉴레이만 1세 재위 대재상을 지낸 루트피 파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저술 활동을 펼쳤다. 특히 정치 · 역사와 관련된 저서들에서는 오스만 왕조의 통치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루트피 파샤는 데브시르메와 궁정 교육을 통해 '진정한' 오스만인으로 만들어져 쉴레이만 1세의 아래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인물이 오스만 왕조의 통치정당성을 어떻게 설명했는가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군주관을 살펴보는데 있어 가장 좋은 예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루트피 파샤는 오스만 왕조를 무잣디드 왕조로 치장하여 그 지배가 정당함을 주장했다. 무잣디드('쇄신자')란 매 세기가 시작될 때마다 나타나 위기에 빠진 이슬람을 쇄신한다는 존재이다. 이 용어는 본래 샤피이파 율법학자들이 서로를 상찬하기 위해 사용하던 존칭에 불과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기 페르시아의 관리들이 몽골인 군주들이 가진 유목 세계적 군주관을 이슬람풍 언어와 관념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무잣디드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시작하며 군주의 주요한 칭호가 되었다. 이후 티무르 왕조를 비롯한 페르시아 지방의 튀르크 · 몽골계 왕조들은 이 칭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본인들의 통치가 정당함을 드러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16세기 시아파 사파비 제국이 페르시아에 성립하면서 인근 순니파 왕조로 망명 온 페르시아인 관리들을 통해 이런 종류의 정치신학을 수용했다. 루트피 파샤의 오스만 왕조 = 무잣디드 왕조론 역시 아마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루트피 파샤는 오스만 왕조가 매 세기 무잣디드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무잣디드 왕조이며, 따라서 이슬람 역사상 전례없이 완벽한 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페르시아의 무잣디드 군주론을 계승 · 발전시켰다.

1550년대 들어 오스만 제국 내외의 정치적 환경이 변화하자 오스만 군주상 역시 바뀌었다. 이제 오스만 군주는 정복왕보다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으며 관료들의 명령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따라 무잣디드보다 더 제도적인 통치정당성 확보가 필요해졌다. 이에 루트피 파샤는 무잣디드 왕조론에 근거하여 오스만 군주가 순니파 정통 칼리프의 계보를 잇고 있음을 주장했다. 15세기 이슬람 세계 각지의 지배자들은 본인의 통치가 신이 직접 예정한 바임을 주장하는 의미에서 칼리프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튀르크 · 몽골계 왕조들의 경우 지배자들은 유목제국의 군주관에 따라 본인이 신이 선택하고 또 예정해 둔 군주임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에 그 후원을 받는 이슬람 세계의 학자 · 관리 들은 이를 이슬람 세계관에 맞게 설명하기 위해 무잣디드 · 사히브키란 등 칭호에 더해 수피즘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던 칼리프의 칭호를 활용했다. 루트피 파샤는 이런 수피즘의 맥락에서 튀르크 · 몽골계 왕조들에 도입된 칼리프 칭호에 무잣디드 왕조론을 곁들여 이를 근거로 오스만 왕조를 정통 칼리프에까지 연결지었다. 요컨대 무잣디드 왕조론과 마찬가지로 루트피 파샤의 칼리프 개념 역시 겉으로는 이슬람풍 칭호였으나, 그 이면에는 유목 제국의 논리가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슬람풍 관념을 이용해 군주의 지존화를 추구한 루트피 파샤의 정치신학은 근대 초기 이슬람 세계의 다른 두 제국, 무굴 제국 · 사파비 제국 뿐만 아니라 또다른 유라시아의 육상제국인 대청 제국 · 모스크바-러시아 제국과도 비교할 수 있다. 근대 초기 이슬람 세계의 세 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 제국으로부터 광역 지배와 다민족 통합을 계승했던 대청 제국과 모스크바-러시아 제국은 군주의 지존화를 통한 통치정당성의 확보책도 물려받았고, 제국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 특징을 간직했다. 그런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오스만 제국 · 대청 제국 · 러시아 제국이 결국 붕괴한 것은 시기적절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