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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민중사상의 주류는 정감록 사상이다. 정감록의 내용은 李氏를 대신하여 鄭氏가 도읍을 세운다는 ‘李亡鄭興’의 논리가 핵심이다. 이 논리를 실현시키는 방법으로는 海島에서 鄭眞人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새 왕조를 세운다는 ‘海島起兵說’이 있다. 또 정감록에는 난리가 났을 때 몸을 보전할 수 있는 곳인 ‘山林’이나 ‘弓弓處’와 같은 곳을 제시하고 있다.

정감록의 ‘이망정흥’ 논리는 단독으로, 또는 生佛이나 무속, 미륵신앙과 함께 할 때도 있지만, ‘해도기병설’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조선 후기에는 도망노비나 유민을 비롯한 민인들이 해도로 들어갔다. 해도기병설을 현실과 연결하면, 해도에 들어간 사람을 정감록의 해도 군사로, 이들의 수장을 진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감록 관련 민중운동은 시기별, 왕대별로 특징이 있다. 숙종 때는 생불과 미륵신앙관련 사건이 자주 일어나며, 유언비어가 일반적이다. 영조 때는 괘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영조 전 기간 동안 조정에서는 변란 유형의 사건이 일어나면 여지없이 무신란의 餘黨 소행으로 간주하였다. 정조 때는 ‘한글 정감록’이 나돌 만큼 정감록이 대중화되었고, 유언비어나 괘서와 함께 ‘거사 모의’가 변란의 주류였다.

조정에서는 정감록 관련 사건이 일어날 경우에 정감록을 차단하고 근절하고자 하였다. 또 국왕의 敎書 등을 통해 성리학의 지배 논리를 강화하면서 민심을 수습해 갔다. 조정에서는 변란의 주역들을 ‘思亂之心’을 가진 자로 인식하고 ‘위정척사’를 강조하였다.

변란 유형 민중운동의 주역들은 주로 ‘몰락양반’이다. 이들은 민인들과 접촉하면서 정감록 사상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고 변란을 기도하였다. 또한 ‘사란지심’을 품고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변란을 기도하였다. ‘異人’과 같은 신이한 능력의 소유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 변란 주역의 擧事 명분으로는 신분제 혁파와 경제적 평등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反正’을 주장하였다. 또 義兵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정감록 사상은 변란 유형 민중운동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고, 사회 변동의 촉매제 기능을 함으로써 민중의식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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