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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계 渡來⼈의 정체성을 백제 遺⺠과 연결을 지어 밝히려 한 본 연구는, 먼저 渡來⼈의 정체성의 양태를 백제 渡來⼈의 地名, 姓氏 등에서 찾았다. ‘⼤僧正舍利甁記’의 ‘百濟왕자’, 俗姓 ‘高志’씨의 분석, ⾏基 고향에 왕인 후예 성씨들이 많이 살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新撰姓氏錄』의 도래계 성씨 및 백강 전투에 참여한 인물들도 분석하였다.
다음으로 渡來⼈이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밝혔다. 일본 고대문화의 鼻祖인왕인 후예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渡來⼈은 그들의 정체성을 수백 년 동안 지켰다. 渡來⼈을 위한 숙박 시설, 마한‧백제와 관련이 있는 말(馬) 사육 및 도요지 유적 등을 분석하여 河內,和泉 등 여러 곳에서 渡來⼈후예들은 동족집단을 이루었고, ⻄琳寺, 葛井寺, 野中寺 등 氏寺를 건립하였음을 살폈다. 이러한 요인들이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는 백제 遺⺠과 渡來⼈후예의 결합과정 및 정체성 이완 과정을 밝혔다. 皇子 시절부터 실권을 장악한 天武天皇은, 백강 전투 이후 백제 유민들의 지지를 받아내고자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유민들을 이주시키고 관직을 주었다. 이미 그곳의 토착 渡來⼈후예들은, 蘇我氏를 무너뜨린 天智天皇보다, 그들에게 우호적인 天武天皇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도래인 후예와 유민들의 도움을 받은 天武天皇은, 天智天皇 아들 ⼤友皇子와의 왕위계승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天武天皇 집권 기간 도래인 후예와 유민들은 백제계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유리한 상황이 갖추어졌다. 백제 유민이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는 渡來⼈후예와의 만남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天武天皇 때 실각하였으나 持統天皇 때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 권력을 장악한 藤原不比等은, 渡來⼈후예와 유민들을 탄압하였다. 하지만 渡來⼈후예와 유민들의 강고한 정체성은 藤原不比等의 압력을 이겨내는 원동력이었다. 왕인 후예 ⼤僧正 행기가 이들의 구심점에 있었다.
백제계로서의 정체성은, ⾏基가 입적한 이후 급속히 약화되었다. 왕인 후예들이 漢系로 개변을 시도하는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백제 유민에게는 ‘百濟王氏’를, 渡來⼈후예에게는 『新撰姓氏錄』 등재를 통해 체제 내로 회유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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