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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川士淸(1709-1776)와 本居宣長(1730-1801)는 같은 지역 출신으로서 같은 시대를 살면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긴밀히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그들은 神道家로서 『日本書紀』와 『古事記』를 神典으로 認識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인식은 결코 그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고, 그 당시에는 普遍的이었다. 또한 『日本書紀』를 重視하고 『古事記』를 輕視하는 風潮가 일반적인 상황이었지만, 註釋書로서 谷川士淸는 『日本書紀通證』을, 本居宣長는 『古事記傳』을 각각 著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谷川士淸는 『日本書紀通證』 35권을 1751년 완성하여 1762년에 간행하였으며, 本居宣長는 1764년에 起稿해서 1798년 脫稿하여 『古事記傳』 44권을 1790년부터 1822년에 걸쳐 完刊하였다.
谷川士淸의 學問的 寄與로는 첫째, 『日本書紀通證』이 『日本書紀』 全篇에 걸친 것으로서 近世에 있어서 『日本書紀』 연구의 先驅者라는 명예를 가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둘째, 그가 日本 및 中國의 학문에 정통하고 佛典에도 어둡지 않아 合理的이고 實證的 방법을 취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한편 本居宣長의 學問的 寄與로는 첫째 『古事記』에 옛날의 遺風이 比較的 잘 나타나고 있음을 반영하여 『古事記傳』을 저술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째 그로 인해 『古事記』가 새로이 인식되었으며, 『古事記傳』이 註釋이면서 동시에 歷史 연구가 될 수 있었던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神道家로서 『日本書紀』와 『古事記』를 神典으로 認識하면서 註釋 작업을 하여 神道의 精神主義가 강하게 내세워진 것은 결점으로 지적된다. 특히 本居宣長의 경우 『古事記傳』 자체가 객관적인 성격을 지닌 학문적 연구가 아니라 그 자신의 宗敎인 神道에 기초한 註釋書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반면에 그를 가장 훌륭한 역사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두 서적을 인용할 때는 嚴重한 史料 批判을 통해서 史實과 說話를 구별하여 인용해야만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지닌다고 생각된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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