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기사보기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 대표형(전거형, Authority) | 생물정보 | 이형(異形, Variant) | 소속 | 직위 | 직업 | 활동분야 | 주기 | 서지 | |
|---|---|---|---|---|---|---|---|---|---|
| 연구/단체명을 입력해주세요. | |||||||||
|
|
|
|
|
|
* 주제를 선택하시면 검색 상세로 이동합니다.
이 글에서는 십일면관음, 천수관음으로 대표되는 변화관음이 7세기 후반~8세기 초반의 신라에서는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그 이유를 당과 신라의 불교문화의 차이 속에서 찾아보았다.
선행 연구에 의하면, 당에서는 현장이 십일면심주경은 한역한 이후인 660년대부터, 신라에서는 680년대부터 변화관음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장을 보완하기 위해 거론한 문헌 자료들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당에서 변화관음의 출현은 690년 무측천이 황제를 표방한 이후이고, 현존하는 십일면관음상 및 삼국유사의 분황사 천수관음 사례를 볼 때, 신라에서 변화관음이 등장한 것은 8세기 중엽 경덕왕대(742-765)인 것 같다.
나당 전쟁 이후 신문왕(재위 681-692)-성덕왕(재위 702-737)의 통치 시기에 신라는 당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불교문화의 유행헤도 민감하였다. 그런데 신라 사회에서 변화관음의 수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를 당과 신라 사회에서 불교문화의 위상의 차이, 국가와 불교계의 관계의 차이, 그리고 전쟁 이후 신라 사회에서 불교계에게 요구한 역할의 측면에서 설명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 전화번호 |
|---|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 번호 | 발행일자 | 권호명 | 제본정보 | 자료실 | 원문 | 신청 페이지 |
|---|
도서위치안내: 정기간행물실(524호) / 서가번호: 대학01
2021년 이전 정기간행물은 온라인 신청(원문 구축 자료는 원문 이용)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저장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