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국회도서관 홈으로 정보검색 소장정보 검색

초록보기

조선 초기 경연에서의 역사서 강의는 정종·태종대 시작되었다. 하지만 횟수나 내용 등에서 아직 충실한 편이 아니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본궤도에 올랐다. 역사 관련 교재의 교과서로 평가되는 『자치통감』·『자치통감강목』 등이 정식으로 강의되었다. 근대사로 간주하던 『송감』 등도 포함됨으로써 그 나름의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중국사에 국한되었고 후대와 비교해 종류도 적었지만, 세종의 수준 높은 학문을 토대로 핵심 경전과의 순환 강독 등이 행해지면서 기초적인 사실의 이해보다 핵심 위주의 토론 등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에서의 목적성도 강했는데 특히 현안이었던 『고려사』의 개찬 문제 등이 포함되었다. 『자치통감』·『자치통감강목』 등의 훈의 작업도 그 일환에 해당한다. 드디어 문종대 『고려사』 등이 편찬되면서 결실을 보았다. 『고려사』가 이후 경연에서 강의되면서 본격적인 자국사 진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뒤 일시 침체하였던 역사서 강의는 경연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성종 때 다시 활기를 띠었다. 어린 나이에 등극했던 관계로 재위 7년까지의 초반기에는 수렴청정을 받았기 때문에 서연의 성질이 다분하고 비정규적인 위상을 지녔던 야대에서 역사서 강의가 이루어졌다. 자체 편찬한 선왕들의 업적을 정리한 『국조보감』이 첫 번째, 그다음 중국의 대표적 제왕학서인 『정관정요』가 진강됨으로써 장차 친정을 펼칠 때의 본보기로 삼도록 기획되었다. 그 뒤를 이어 『강목』과 『고려사』가, 즉 중국의 고전 사서와 자국의 대표적인 역사책이 나란히 강의되는 획기를 맞이하였다.

재위 7년 초에 수렴청정이 거둬지고 친정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경연이 실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명으로 야대가 아닌 법강에서의 『고려사』 강의가 재개되었는데 이로써 위상면에서도 동격이 되었다. 한편 초반기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 고대사의 비율이 높아졌다. 이런 현상은 당시 추진 중이었던 조선적인 통사 체계의 수립 작업과도 연관된다고 보여진다. 즉 과제로 남았던 고대사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군신간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후반기의 역사서 진강이 중국 고대사와 『고려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이 『동국통감』으로 상징되는 조선적인 통사 체계의 수립 과정과 관련되면서 후대의 경연 교재를 편찬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