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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관포 박홍미의 생애와 시세계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2장에서는 박홍미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박홍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文才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당대 저명한 문장가들인 李植, 權韠, 任錪, 鄭弘溟과 이름을 나란히 했고, 원접사 종사관으로서 「淸江賦」를 지어 명나라에까지 문명을 떨쳤으며, 양양부사 때 지은 응지상소가 賈誼의 치안책에 비유되었던 점은 박홍미의 뛰어난 문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박홍미의 환로생활은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체로 무난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광해군대에는 중앙관직을 중심으로 文才에 비해 낮은 관직을 역임했고, 인조대에는 창원부사, 경주부윤, 삼척부사, 양양부사 등 지방관직을 중심으로 역임하였다. 광해군대에 낮는 관직을 맡은 것은 박홍미가 강직한 성품으로 直諫을 하여 북인정권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기 때문이며, 인조대에는 질병이 있어 중앙관직에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박홍미의 시세계를 광해군대와 인조대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박홍미는 광해군대의 정치현실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弱肉强食,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爛羊의 현실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박홍미는 不正의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광해군에게 直諫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강직한 태도는 북인들로 하여금 박홍미를 鷄肋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했고, 그 결과 낮은 관직을 전전하였다. 환로생활에 염증을 느낀 박홍미는 1622년 원접사 종사관의 임무를 마지막으로 귀거래 하였다. 박홍미가 인조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적이었다. 그는 인조대를 태평성대로 인식하고 시종신이 되어 군주 옆에서 直諫을 통해 군주를 聖君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으로 인해 지방관직을 전전하게 되었고 양양부사 때 얻은 병으로 인해 결국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박홍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瑞山에서 한가롭고 평화로운 삶을 詩化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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