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동백림 사건’은 간첩 없는 간첩단 사건으로, 관련자들의 삶에 큰 흔적을 남긴 사건이었다. 이 글은 동백림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박순녀의 「어떤 파리」,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조해진의 「동쪽 伯의 숲」을 대상으로, 동백림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면서 어떤 의미를 생성해내는지를 살펴보았다. 동백림 사건은 사건이 발표된 1967년에서 법원의 판결로 사건이 종료된 1970년에 완료된 일이 아니다. 본고의 대상 작품들에 나타나는 동백림 사건은 시공간을 가로지르고 이동하거나, 이동시키는 인물들의 신념을 따라 움직였던 사건이며 그 과정에서 사건의 의미가 생산된다. 이 세 작품에서 동백림 사건의 전모는 설명되지 않지만, 동백림 사건이 이동하며 생산·재생산하는 ‘이념의 모빌리티’가 잘 드러난다. 동백림 사건 당시가 배경인 「어떤 파리」에서는 월경인(越境人)의 자기 증명의 문제가 동백림 사건과 만나면서, 반공 이념으로는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한 주인공이 그곳에서 만난 동백림 사건이 이동을 막는 권력의 폭력 아래에서 견뎌낸 시련과 외로움이 오히려 자발적인 부동(不動)을 선택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을 보여준다. 「동쪽 伯의 숲」은 발터와 희수의 서신을 통해 독일과 서울, 1960년대와 2000년대의 시공간을 오가는 동백림 사건은 망각되지 않고 다시 기억되면서 공동체 속 개인이 한 발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이처럼 동백림 사건은 그 핵심이 다른 거대담론이나 어떠한 이념으로 정의되지 않은 채, 국가폭력이 압제하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호의를 옹호하며 비슷한 사건들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내는 이념의 모빌리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