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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98년(광무 2) 興宣大院君 薨逝 이후 거행된 사후 의례를 살피고 조선의 왕실과 대한제국의 황실 인물 의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흥선대원군의 사후 의례의 특징과 그의 지위를 파악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1898년 2월 22일 훙서하였고, 禮葬은 明溫公主의 예장을 전례 삼아 진행하되 공주의 예장과 절차 차이를 두었다. 4일의 停朝市, 五虞祭 등의 특징을 통해 예장 시 대원군의 지위는 공주에 준하거나 그보다 높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07년(융희 1) 흥선대원군은 獻懿大院王으로 추봉되었다. 대원왕 추봉 의례는 義王과 英王의 책봉 의례, 完王의 추봉 의례와 비교하였을 때 진행 과정은 유사했으나 황제가 직접 참여하지 않고 完順君을 보내 攝行하게 했으며 金冊과 節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추봉 시 대원왕의 지위는 친왕에 준하거나 그보다 낮았다.
흥선대원군이 대원왕으로 추봉된 후 대원군의 묘 또한 격상된 지위에 맞춰 興園으로 명칭을 바꾸고 遷奉하였다. 흥원은 대원군 묘 조성 당시 사용했던 석물 대부분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宮園制를 활용하여 봉원하였는데, 이는 대한제국에서 궁원제를 활용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이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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