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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 오국헌은 청나라의 침략에 울분을 토하고 은일의 삶을 자처한 선비다.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나 충청도 공주에서 생활하였다. 25세 때에는 충청도 연산의 사계 김장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이어갔다. 송시열, 송준길 등 충청지역의 문인들과 교유관계를 이어 갔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대한 분노와 대명의리를 잊지 않으며, 경상도 단성지역에서 은거하며 의리정신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본고는 조선중기 척화론과 북벌론을 주장하며 대명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던 오국헌의 의리사상과 병자호란 이후 울분에 빠져 은거를 선택했던 그의 출처관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현재 전해지는 오국헌의 문집 현황을 살펴보았으며, 문집에 실린 작품 속에서 그의 학문 태도와 의리사상, 은일거사의 모습을 밝혀보았다. 오국헌은 은거생활을 하면서 산수유람과 유유자적한 생활만을 영위하지는 않았다. 항상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과 청나라에게 받은 치욕을 잊지 않았다.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도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주변의 인물들과 후대인들은 그를 ‘대명처사’라고 불렀다. 청나라 오랑캐에게 당한 치욕으로 세상에 나가 벼슬할 이유가 없었으며 그는 어떠한 공명도 바라지 않고 단지 의리만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오국헌은 만년에 경상도 단성지역에 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공주지역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진 장소나 유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그는 충청지역과 공주에서 활동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고,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문인들과 교유관계도 지속적으로 맺어 왔다. 지역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학문과 사상, 그리고 배움을 실천하는 오국헌의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