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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부터 조선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한반도의 이곳저곳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다. 따라서 그 선교사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통로이다.
서울은 선교사들에게 교회행정의 거점이었고, 정치의 중심이었다. 서울과 서울 인근 거주 선교사들은 교구청이 위치하는 서울을 자주 방문하였고, 지방 거주 선교사들도 선교사 연피정 때는 서울을 방문하였다. 서울에는 사대문 안과 밖에 각각 하나의 본당이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서울 거주 신자들의 신앙과 함께 서울 사람들이 정세 변화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용산은 신학교가 있는 곳으로서 관심을 두었는데, 한국을 잠깐 사목방문하였던 베네딕도회 선교사는 일본인들의 서울 침략이 용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간파하였다. 오랜 동안 생활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의 움직임에도 민감하였다. 통감부의 설치부터 일제의 침략과 힘을 느꼈고 일제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전남에 대한 선교사들의 생각은 외지고 교통이 불편한 시골, 그래서 정보가 부족하고 외래문화에 배타적인 곳이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보면 전남은 지리적으로 먼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교회적으로도 교회 외적으로도 서울을 중심에 두었고, 서울 인근에서 활동하고 싶어 했다. 전남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전남의 외짐을 강조하였고, 교통 불편을 호소하였다. 또한 전남지역민들이 외래문화에 배타적이라고 주교에게 하소연하였다.
그런데 대한제국기에 전남에 설립된 본당들은 전남의 중심 지역에 위치하지 않았다. 목포가 개항으로 인해 발전되리라 예상하고 목포에 본당을 설립했다는데, 목포는 한국에서 수탈한 물품들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항구였다. 우적동본당이 설립된 곳은 선교사들도 인정한 시골이었다. 나주본당이 설립된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 본당들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본당이 위치한 곳의 주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한국인 성직자도 푸대접을 받은 것은 우적동의 지역적인 배타성 때문이 아니라 생소한 천주교 문화에 대한 거부였다. 그리고 이런 반응과 태도는 우적동에서만이 아니었고 전국적으로 비슷하였다. 전남지역이 외지고 그래서 배타적이라 보았던 선교사들의 시각은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치우친 관점이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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