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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동유東儒는 호계서원 훼철 후, 꾸준히 서원복설을 주장하며, 상소와 무력투쟁으로 저항하였다. 이 시기 서원은 강학공동체이자 정치적 공론화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이를 추동한 것은 사학邪學에 대응한 정학正學 사수였다. 그러나 협동학교 설립을 계기로 이들 동유 사이에는 갈등 양상이 표면화되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 강했던 안동지역에서 신학교 설립은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다. 1차적으로는 인식의 전환과 이를 구체화시켜 나가는 과정이었고, 2차적으로는 실제 설립과 운영에 따른 교사와 재원 마련 등과 같은 현실적인 과제들이 산재해 있었다. 안동에서 신학교 설립은 공맹孔孟의 학문이 아닌, ‘사邪’ 혹은 ‘금수禽獸’로 인식되던 이질적 문명의 선택적 수용이기도 했다.
안동지역에서 1908년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협동학교 설립은 이를 둘러싼 논쟁이기도 했다. 특히 기존 강학공동체와 지향을 지탱하던 서원과 사우의 재산 전환은 중요한 화두이자 논쟁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협동학교의 설립은 이들의 역학 구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협동학교 설립 후 진성이씨 문중의 보문의숙, 하회의 동화학교, 해창 송기식의 봉양의숙 등의 설립에는 협동학교 설립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는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한 기존 교육공동체의 영향력 상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흐름은 이후 새로운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이후 만주 망명을 선택한 대다수 유림과 그 후학들은 협동학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또한 1920년대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신학교를 통해 교육의 주체 및 사회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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