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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초기 전라북도 고창지역에서 활동한 溪堂 鄭悔燦(1759∼1831)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문학적 면모를 조명해 보려는 데 목적이 있다.
정회찬은 과거에 실패한 뒤, 계당리에 溪堂亭을 지어 은거하면서 가학을 계승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족보 편수에 정력을 쏟아 가문의 명성 수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十毋」와 「十必」로 자손들을 경계시키며 處士의 삶을 살았다.
그의 학문은 가학과 사승을 통한 우암 학맥 연원, 理氣의 율곡설 계승, 경세치용의 실학적 사고 발현 등 3가지 면에서 기호 노론 계열과 실학적 성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리와 기를 합일적 관계로 파악한 정회찬의 성리설은 리와 기의 혼일적 차원에서 理一元論을 주장하는 노사 기정진의 성리설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되며, 田制 등에 대한 의견은 三政의 문란을 대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정회찬은 이러한 삶과 학문을 문학에도 투영하였다. 그가 漢詩에 투영한 사유와 흥취는 3가지로 살필 수 있다. 첫째, 明德, 心, 性, 情 등 성리학 명제에 대한 성찰과 사유 발현으로, 수양에 의한 철저한 도덕적 실천을 보여준다. 둘째, 계당팔경에 담은 처사 삶의 흥취로, 西學과 청나라 문물 유입의 시대 흐름 속에서 그는 은거지 계당의 팔경을 읊어 학문 침잠으로 세도부지의 사명 의식을 드러내기도 하고 도의 체찰을 징험하기도 한다. 셋째, 발상 전환의 재치와 유희로, 뜻밖의 사건이나 난감한 상황에서도 분노 대신 재치 있고 인간미 넘치는 유머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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