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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지역은 삼국 이래 조선말기까지 지리적으로 중국으로 가기 위한 통로, 영남과 호남을 잇는 교통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죽산지역은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후삼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호족간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였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후백제 및 궁예를 후원했던 청주세력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앙세력에 의한 경영이 촉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이 강조된 내륙행정도시로 변화함과 동시에 거란의 1차 침입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도 중요시 된 것으로 보인다. 명종 2년(1172)에 감무를 설치하여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군사적인 성격에서 농업과 상업의 교류를 위한 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지역으로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죽산지역 내에서 확인되는 출토유물 시기를 분석해 보아도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전반에 걸쳐 죽산지역은 지방도시로써 꾸준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죽산면 일대에서 고려시대 유적의 성격을 바탕으로 공간적 특징은 죽주산성과 망이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남쪽(진천-청주)에서 올라오는 고대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배치되고 있다. 불교유적과 생산 및 생활유적은 죽산천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되어 확인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분묘유적은 비봉산과 남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북쪽에 위치한 비봉산의 분묘 분포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인구의 증가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인구의 밀집도를 알 수 있는 비봉산에 분포한 매산리 고분군과 더불어 농업 및 상업경제를 기반으로 발전한 왕실사찰인 봉업사지가 위치함에 따라 죽산천 북쪽구역을 지방도시의 중심권역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렇듯 죽산지역은 지방도시로서 체계적인 발전양상을 보였으며, 당시의 정치 이념을 반영한 도시설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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