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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860-1945년 만주와 중국으로 이주한 장로교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정착한 7개 지역에서 그들의 생존방식, 독립운동, 선교활동의 역사와 특징을 고찰하여 비교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북장로회가 관할했던 지역은 남만주 서간도, 남만주 봉천·안동·영구, 북만주 등 세 지역이다. 캐나다선교회는 동만주 북간도를 관할했다. 서간도는 남만노회(1921), 봉천·안동·영구는 봉천노회(1935), 북만주는 북만노회(1931), 북간도는 동만노회(1925)에 소속되었다.
서간도 한인교회는 북간도 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어렵고 위험한 조건에 처해 있었다. 중국의 국공내전, 만주사변은 서간도의 한인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인 관계가 일본과 한국인에 대한 중국 관리들의 반감이 서간도에서 더 부정적이었다.
1920년 경신참변 이후 북간도는 상대적으로 서간도 보다 피해를 빠르게 회복했다. 북간도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기에 사회에서 교회의 지도력이 컸다. 교회는 캐나다선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기독교 학교에서 자녀를 교육시키기 용이했으며, 타국 생활의 긴장에서 정신생활의 안정을 제공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전에 경제적, 사회적 생활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북간도 진보적 개신교인들은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신앙적 철학적 근거를 발전시켰다.
서간도는 한인 규모와 분포 범위로 볼 때 응집력이 훨씬 떨어졌다. 만주사변 이후 서간도에서 북장로회 신빈선교지부가 철수한 것, 한인교회 지도자들과 중국 관리들과의 관계성이 약한 것도 한인교회 성장에 불리한 요인이었다.
서간도 한인교회는 1920년 이후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지적인 작업이 발견되지 않았다. 북간도는 이상촌 건설, 종교의 자유, 독립운동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정착했다.
남만주 봉천·안동·영구 지역은 일제의 만주침략의 거점이어서 한인교회의 민족운동은 어려운 곳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한인교회는 성장했다. 북만주는 모범농촌 조성을 위해 이민이 추진되었고, 러시아에서 기독교인이 유입되었고,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장 피해를 받았다.
상해·남경·북경의 한인 교인들은 대부분이 지식인 계층이었고, YMCA와 선교사를 통해 국제 질서에 대한 식견을 개발했다. 이들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운동을 구상했고, 더 나아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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