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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즉위하자마자 시행한 시책 중의 하나는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본래 신분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신 등의 반발에 부딪혀 대규모 환량(還良)은 실현되지 못하고 왕실 재정으로 1천여 구(口)를 속환(贖還)하는 데 머물렀다. 태조는 제민(齊民)·여원(黎元)·편맹(編氓)·적자(赤子) 등으로 ‘민’을 지칭하였는데, 양천(良賤)의 준별(峻別)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태조 이래의 다소 모호했던 ‘양’과 ‘천’에 대한 관념은 광종 7년(956) 노비안검법의 시행으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노비의 안험(按驗)은 인신(人身)의 신분을 가늠하는 기준이 마련되었음을 전제하며, 불충분한 ‘합의’가 좀 더 충분히 수렴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종의 노비 안험은 공신이나 호족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노비안검법의 폐해나 신분의 하극상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은 중앙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노비 소유주가 대상에 포함되고 지역적으로도 범위가 넓었던 반증으로 해석된다. 아울러 국가의 세수 확보를 위한 여러 시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노비 안험이 이루어진 만큼 대규모 환량을 통해 국가의 담세층인 공민을 늘리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양천의 신분관념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양천 신분질서와 관련된 법규들이 제정되었다. 성종 대와 현종 대에 방량노비·환천노비·불법 점유 노비에 대한 처리 방안이 정해졌으며, 드디어 정종(靖宗) 5년(1039)에는 천자수모지법(賤者隨母之法)이 세워졌다. 그리고 신분질서가 자리잡혀 가면서 양천은 특정 권리나 자격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천구(賤口) 출신의 관료는 공음전을 수급할 수 없었으며, 양천이 분간되지 않으면 친족의 전정(田丁)을 승계할 수 없었다.

고려 초는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분관념과 질서가 형성되는 시기로서 다양한 사회구성원을 고려사회가 지향하는 지배질서 속에 편제해야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신분질서의 확립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양천법 역시 그러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고려의 양천 신분질서는 나말여초의 다종다양한 민을 양 혹은 천의 신분으로 구획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어 갔으며, 이는 고대와는 다른 새로운 신분질서를 구축하는 동시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공민을 ‘민’ 또는 ‘양인’의 형태로 확보하려는 이중적인 목적성도 포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