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流 沈誠之(1831~1904)는 근대 이행기 신문물이 도입되고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탄압이 거세어지는 물결 속에서 유학자로서의 입지를 견지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896년의 의병 활동은 6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 한 우국적 행동은 역사에 길이 칭송되고 있다. 19세기 퇴계학맥의 종장인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그는 남인 일변도의 청송지역에서 서인의 입장을 고수한 것은 매우 특이하고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만의 독자노선이 아니고 6대조인 沈釳이 栗谷 李珥와 沙溪 金長生을 제향한 병암서원을 창설하는데 지역 유림으로서 참여한 것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학문적 경향에서는 우암 송시열이 정찬휘에게 답장한 『대학』에 대한 견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沙溪 金長生의 小華說을 수용하고 있다. 또 상복 제도에 있어서도 서인인 淵齋 宋秉璿의 中殤 七月說을 따르고 있다. 그는 족숙과 함께 송시열의 종택을 방문하였던 사실이나,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동서원을 탐방한 것에서 보듯이 그의 가문 내면에는 청송지역 여타 가문이나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서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보다는 서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성지가 남인 세력이 득세하는 청송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퇴계학파의 서인계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는 대신에 당색과 당파를 초월하여 공존의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결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