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 Ⅲ기부터 백제 한성기에 이르는 남한강유역권의 취락과 고분 유적에 대한 물질자료 검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백제의 남한강유역의 진출과 지배 전략의 변화를 파악해 볼 수 있었다. 먼저 백제는 원삼국시대 이래로 구축되어오던 전통적 유통망, 특히 진천식 토기류와 충주 철의 생산에 주목하여 이 망을 장악하고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백제는 원삼국시대 이래의 가장 강력한 세력권을 형성했던 평창강유역권 세력과 원주 가현동 등 섬강유역권 내 일부 세력을 소멸시키는 대신 점진적 통합방식을 이용해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남한강본류권을 중심으로 우호세력을 포섭하였다. 이를 통해 한성과 인근지역이었던 양평, 광주, 여주 일대는 육각형주거지와 일자형 부뚜막의 도입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도 기존 전통 세력이 유지되었고, 원주 법천리 세력은 전통적 교역망 상에서는 위계가 높지 않았으나 백제로부터 교역의 중요 거점으로 인정받아 양형청자 등 위세품을 하사받고 백제식 방형석실을 축조하는 등 남한강유역권의 맹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충주세력은 철생산이 중심이었던 4세기 중반까지는 그리 위계가 높지 않은 채 생산과 유통에 그 역할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고구려의 남하에 따른 급격한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법천리 유적과 함께 탑평리 신흥세력의 부상, 황새머리고분군의 조영, 장미산성의 축조 등을 통해 대고구려 방어선 구축에 본격적으로 힘을 보태게 되면서 그 위상이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