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기사보기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결과 내 검색
동의어 포함
이 글은 고려 무신집권자 최충헌의 시회 개최 의도와 시회를 통하여 어떻게 문신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정립하였는지 고찰한 것으로, 시기와 참석자를 중심으로 시회의 개최 배경과 의미를 파악한 글의 후속연구이다. 시회를 개최하면서 최충헌이 제시한 시제(詩題)를 검토하여 시회의 개최 의도를 분석하였으며, 국왕이 참석한 희종 4년 3월 시회에서 한림원 소속 금내유신들이 쓴 응제시와 최충헌에게 올린 글을 통하여 최충헌의 정치적 지위를 살펴보았다.
신종 2년(1199) 첫 시회에서 최충헌은 “천엽유화(千葉榴花)”를 시제로 제시하며 자신의 정권 또한 천엽유화처럼 번성하고 대를 이어 융성하기를 바라였다. 희종 원년(1205) 시회에서 최충헌은 고려 왕조를 상징하는 나무이기도 한 소나무, “쌍송(雙松”)을 시제로 급제 문신들에게 글을 쓰도록 함으로써 국왕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절개와 충성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희종 3년(1207) 최충헌의 사제에서 열린 “모정(茅亭)”을 주제로 한 시회에서 이규보는 「진강후모정기」에 모정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최충헌의 장수를 빌었는데, 이것은 최충헌의 바람을 그대로 담은 것이라고 하겠다. “공작(孔雀)”을 시제로 한 고종 즉위년(1213) 시회에서 최충헌은 국가 의례와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물 중 하나인 공작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와 위상을 국왕에 버금가는 것으로 높이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종 2년(1215) “관기시(觀碁詩)”를 주제로 한 시회는 정치적인 의미보다 최충헌이 즐겼던 바둑을 시제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희종 4년(1208) 3월 국왕이 행차한 시회에서 희종은 어제시를 짓고 이규보를 비롯한 금내유신은 응제시를 지어 올렸다. 응제시는 희종의 행차와 어제시 하사에 대한 감사함을 담고 있었지만, 최충헌과 그의 사제를 높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금내유신이 최충헌에게 바친 시와 감사의 글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확인된다. 금내유신이 작성한 응제시는 고려시대 관각시의 전통과도 멀었으며 문한을 담당하는 관리로서의 본분도 잃어버린 것으로, 당시 집권자 최충헌의 의도에 맞는 글을 작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충헌은 시제에 부합한 글을 작성한 문신들에게 관직이라는 포상을 수여하며 이들의 충순도를 테스트하였고, 최고 권력자가 자신임을 확인시켰다. 최충헌은 국왕과 문신 간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와 시회를, 그와 그의 정권을 정당화하고, 권력을 확인하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문신을 기르는 데에 이용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 전화번호 |
|---|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 번호 | 발행일자 | 권호명 | 제본정보 | 자료실 | 원문 | 신청 페이지 |
|---|
도서위치안내: / 서가번호: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저장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