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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3~16세기 산림천택(山林川澤) 통제의 제도화 과정을 고찰하였다. 고려 말 산림은 단순한 생활 자원의 차원을 넘어 왕실·권문세족·사원·농민 등 다양한 행위자가 얽히는 갈등의 공간이었다. 권세가와 사원의 사점(私占) 확대는 백성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였으며, 1127년(인종 5)의 조서가 천택을 백성과 함께 이용할 자원으로 선언했음에도 현실에서는 ‘여민공지(與民共之)’의 원칙이 붕괴되었다. 원 간섭기의 전함 건조와 강제 수탈은 산림 훼손을 구조적으로 심화시켰고, 14세기 후반 잦은 수재와 홍수 피해는 무분별한 벌목과 토사 유출, 산지 붕괴의 누적 결과로 나타났다.
조선 건국 이후 산림천택 통제는 제도화의 단계를 밟았다.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시기 추진된 중송정책(重松政策)은 소나무를 국가 전략 자원으로 집중 관리하는 체제였으며, 금산(禁山) 지정·사점 금지·개천(開川) 정비는 단순한 자원 관리책을 넘어 왕조 권위 확립과 권력 질서 재편의 장치로 기능하였다. 또한 이러한 통제는 홍수·한재·풍해 등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산림 관리와 제방 축조, 식재 정책은 민생 안정과 직결된 재난 대응 체제였다.
고려 말의 사점화와 정치사회적 혼란의 경험은 조선 초 산림천택 통제의 제도화로 이어졌다. 새 왕조는 이를 통해 권력 질서를 재편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후 조선 전기 산림정책은 태조~세종대의 국가 주도적 공유와 금산 정책, 성종~연산군대의 왕권과 신권 갈등 속에서 사점의 확대·변질, 중종~명종대의 권력층 전유와 사회적 저항의 단계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궤적에서 산림천택은 단순한 자연 자원이 아니라 군신 관계와 권력구도, 사회경제 질서의 재편과 직결된 복합적 제도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산림천택은 목재·식량·땔감·어획 등 일상생활 기반을 제공했기에, 그 사점화는 토지나 특정 생산물의 독점과 달리 백성의 생계 기반을 직접적으로 침해하였다. 따라서 산림천택에 대한 국가 통제는 단순한 경제 권력 재편이 아니라, 공공 자원 회복을 통한 통치 정당성 확보와 지배질서 재편이라는 정치·사회적 함의를 지닌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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