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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후대에 절의(忠節)의 표상(表象)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의 이론 틀 안에서 고찰하였다. 기존 연구들이 박상의 문학적 성취에 주목한 데에 반해, 본 연구는 박상이 후대의 정치적・문화적 재해석을 거쳐 어떻게 충절의 표상으로 전승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다.
중종 연간 박상이 김정(金淨)과 함께 올린 폐비 신씨(愼氏) 복위 상소는 당대에 유배라는 정치적 탄압으로 이어졌으나, 기묘사화 이후 기묘사림에 대한 재조명 속에서 정당성을 부여받으며 충절의 행위로 기억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숙종・영조・정조 대에 이르러 신씨의 복위가 국가적 차원에서 논의되고 실현되면서, 박상은 치제, 후손 등용, 불천위 지정 등의 국가적 의례에 의해서 그 충절이 정전화(正典化)되었다.
아울러 박상의 충절 표상은 특정 장소와 결합하며 보다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문화 기억으로 정착되었다. 예컨대, 소요당(逍遙堂)은 본래 교유와 은일의 공간이었으나 기묘사화를 주도한 심정(沈貞)을 풍자한 박상의 시구(詩句)로 인해 그 상징성이 전복되어 풍자의 공간으로 거듭나면서 박상의 기개와 절조를 드러내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또한 삼인대(三印臺)는 신씨 복위 상소를 준비한 실질적 현장으로서 비석과 비각이 세워짐에 따라 충절의 실천을 기념하는 장소로 기능하였으며, 후대의 윤리적 성찰을 촉발하는 문화 기억의 장치로 전승되었다.
결론적으로 박상의 충절은 후대의 정치적 조건과 문화적 해석, 국가적 제도와 의례, 장소적 상징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형성・고착된 집단 기억의 산물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유교 정치 문화 속에서 충절이 기억되고 기념되는 방식과 그 구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향후 조선 시대 유교 정치 문화 내 기억 형성 연구의 확장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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