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appearance)이라 혹은 현실(actuality)이라 불리는 것을 유실(有實)이라 고쳐 부른다. “유”(有)는 어떤 것과도 대조 관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 아무래도 “현상”은 “실재”와 대조 관계에 들어가 있으므로, 유실(Being)이라 고쳐 부르자는 것이다. 그것(Es) 은 두 번 나누어서 주어지지 않는다, 실재와 현실이든 또 어떻게든. 그것(Es)은 한 번에(once and for ever) 주어진 것, 유실(φύσις)일 뿐이다. “실”은 어떤 것과도, 가령, 허(虛)와, 대조 관계에 들어가 있지 않다. 허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이쪽 우리 사람(we as a species)이 자칫 있다고 잘못 믿어서, 있다. “실”은, 대신에, 유의 본질적 속성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유는,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 유는, 간단히 말해, 실(實)하다. (나의 “실”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다). 덜 실한 것은 있어도, 실하지 않은 것은 없다. 있는 것이 모든 주권을 갖는다, 이쪽 우리가 할 일이란, 있는 것이 저 스스로 저 자신을 알려 오는 소리를 조용히 듣는 것이다. 그것이 학문의 소명이다. 우리에게 (왕왕 지독히도 어려운)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출제하는 것도 유실, 그러나 또 언제나 답안을 품에 감추고 있는 것도 (앞서) 어김없이 같은 유실(Full Being)이다. 유실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가까움이 덕목이다. 유실이란 것이 도대체 있다. 이것이 학문의 길을 묵묵 성실히 걸은 자의 최종 감정이다. 그것은 경탄(Erstauen) 이다. 문제와 답의 언어, 곧 사고의 언어가 완전히 연소한 곳에서, 저 학자는 거대한 우연 앞에 서 있다. 그러나 학문이 (도대체 이) 사람(이라는 것)의 능선이 끝나는 최종인 것은 결단코 아니다. 학문은 하나의 예비일 뿐이다. 학문에서 싹으로 암시되었던 것이 나중 어느 능선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앞서 저 거대한 우연을, 자 이제, 하나의 필연으로 보는 것은 (앞서 경탄과는) 다른 느낌(μετὰφύσις)이다. 저 두 번째 범주의 느낌을 우리는 “예술”(Kunst)이라 (“종교”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찌 됐든, 예술은 아득히 먼 곳에 대한 느낌이다. 학문은 가깝고 예술은 멀다. 학문이 가깝지 않으면 예술은 멀 수 없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글은 학문의 가까움에 대한 사례 연구다. 사례는 수학(적 무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