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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서는 임진왜란 종전 직후부터 선조가 사망할 때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전전(戰前) 체제로의 복귀 움직임과 그에 반(反)한 민심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구적 특성을 확인함과 동시에, 전쟁은 그 승패를 떠나 전후(戰後)의 대응 방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맞은 조선은 세습노비제와 공납제 등 중국에도 없는 모순된 제도와 부정부패의 누적 등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더욱 큰 망국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은 인적⋅물적자원 동원 체제 구축 등 전란 극복을 위해 신분제 완화 및 공물작미법(대동법) 시행 등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였고, 류성룡을 중심으로 이러한 전시 대책이 추진되어 국난 극복에 기여하였다. 즉, 면천과 서얼 허통 등 신분제의 벽을 허물어 백성들이 차별과 소외의 질곡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이 자발적인 의병 활동과 군량의 조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한 백성들은 이러한 전시 대응책이 종전(終戰) 이후에도 발전적으로 승계되는 것을 간절히 희망하였다. 그러나 국왕 선조와 양반 등 기득권 지배층은 이러한 전시 조치들이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심각하게 붕괴시키는 ‘사회 변동의 촉진제’라고 받아들였다. 또한 그들은 명나라 황제가 칙서를 통해 ‘창업에 버금가는 분발과 성리학에 매몰된 문약의 극복’ 등 일대 혁신을 촉구하였음에도, ‘여민휴식’을 명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종전(終戰)과 더불어 개혁을 주도하였던 류성룡을 축출하는 한편, 전시 조치들을 백지화하고 신분제 복구에 나섰다. 종전 후 선조가 사망하기까지 10년 동안의 기간에 면천법이 폐지되고 서얼허통이 다시 금지되었으며, 노비충군⋅공납제 개혁⋅화폐 유통 등 진취적이고도 현실적인 대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조선은 전시에 군공 또는 납속 유공자에게 배부하였던 공명첩까지 몰수하여 소각하는 등 대국민 약속 위반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임해군과 순화군 등 왕자들은 연일 음주가무를 즐기는 가운데 살인과 약탈을 반복하여 만악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또한 대표적 ‘권력형 비리’인 방납과 궁방절수가 부활하여 백성들을 다시 착취⋅침탈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불교에 경도되는 가운데, ‘만인 동갑회’나 ‘수륙회’와 같은 집단 행동으로 실망과 분노를 나타냈다. 백성들의 이러한 동요로 인해 사헌부가 ‘백련교도의 난’과 같은 민란 발생을 두려워 할 정도로 종전 후의 조선 사회는 동요하고 있었다. 징비(懲毖)를 통한 국가 개조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채, 전후(戰後)의 조선에는 민심의 이반⋅왕권의 실추⋅군사력 약화 등 통치 환경들의 악화 속에 광해군의 혼정과 후금의 침입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