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이건창(李建昌)이 지은 책으로 선조(宣祖) 때부터 영조(英祖) 때까지의 조선 당쟁사이다. 각 정파들의 음모와 모략의 실체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으며, 드디어 영조가 대탕평을 펼치는 일에서 끝을 맺고 있다.
“‘지금 사람들이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들로 붕당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결국에는 반드시 이 나라에서 뿌리 뽑기 어려운 커다란 화근(禍根)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준경의 말을 들은 이이가 상소를 올렸다. ‘조정(朝廷)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하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죽으면서 그 말이 사납습니다.’ 이때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는 이준경의 생전의 관직을 삭탈하고자 하였는데 유성룡(柳成龍)이 홀로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말하였다. ‘대신이 죽음에 임박하여 임금에게 올린 말이 부당한 것이 있으면 물리치는 것은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준경은 살아 있을 때 공덕이 있었습니다. 죄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준경의 유언이 있은 지 수년 후에 그 말이 맞아들었다.” (본문 내용 중에서)
서문: <당의통략>과 이건창
<당의통략>은 조선의 지식인이 비판적으로 바라본 조선조(朝鮮朝)의 당쟁사라는 의의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은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자주 발생할 무렵인 철종 3년(1852)에 출생해서 조선이 사실상 망국을 눈앞에 둔 고종 35년(1898)에 사망한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23세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 황각(黃珏) 등과 교제함으로써 문명을 떨쳐 <매천야록>의 저자인 황현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데에는 색다른 배경이 있다. 강화도에 살던 그의 조부 사기(沙磯) 이시원(李是遠)은 병인양요 때, 강화유수가 도망가자 중제(仲弟) 지원(止遠)과 함께 약을 마시고 순절(殉節)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는 강화도에서 특별히 별시(別試)를 실시하고 그의 손자 이건창을 급제시킨 것이다. 이때 사망한 조부 이시원은 순조 15년(1815)에 정시(庭試) 갑과(甲科)에 장원한 재사였으나 소론이라는 집안 배경 때문에 노론이 득세한 당시에 별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정5품인 홍문관교리에 올랐다. 그 후 경기어사.춘천부사 등을 지냈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세가(勢家)들과 부딪치다가 파면당한 후 10여 년 간 향리에 은거했다. 다시 등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사직하고 향리인 강화도로 귀향하였다가 병인양요 때 자결로써 순절한 것이다.
이건창은 출사한 후 26세 때 호남 우도(右道)의 안렴사(安廉使)로 충청도의 암행에 나섰을 때 당대의 세도가인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을 논핵했는데 오히려 조병식의 음모에 걸려 북변의 벽동(碧潼)으로 귀양 가기도 했다. 그 후 31세 때 통정계(通政階)에 올라 경기 13도의 진휼사(賑恤使)로 명성을 떨쳤다. 이건창은 30대에 잇따라 부모상을 당해 시묘(侍墓)를 했다. 33세에 어머니 윤씨가 돌아가 향리에 내려갔다가, 탈상 후 2년 후엔 양산(梁山)군수로 있던 아버지 이상학(李象學)의 상을 당해 복상(服喪)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문학수업과 저술작업은 두 번에 걸친 복상기간에 이루어진 것이며 <당의통략>도 바로 이때 강화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건창의 출생지는 강화도 사곡(沙谷)인데 그가 이곳에서 태어나게 된 데는 조선의 당쟁과 얽힌 장구한 사연이 있다. 그의 5대조(五代祖) 이광명(李匡明: 1701∼1778)이 강화도에 은거한 스승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를 따라 이곳에 이주하면서 그 일문(一門)의 강화도 은거와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가학(家學)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정제두는 강화도에 은거해서 이단으로 몰리던 양명학(陽明學) 연구에 평생을 바쳐 <학변(學辯)> <존언(存言)> 등의 저술을 남긴 한국 사상사의 거목이다. 소론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제자인 정제두는 당시 노론이 주도하는 주자학(朱子學) 절대주의에 반기를 들고 벼슬을 버린 후 강화도에 은거해 양명학을 연구했던 것이다. 그 후 이광명 같은 문인들이 스승 정제두를 따라 강화도에 이거함으로써 강화도는 조선 양명학의 본산이 되고 이른바 ‘강화학파’라는 한국 사상사의 특이한 한 학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광명은 정제두의 아들 정후일(鄭厚一)의 사위일 정도로 하곡의 집안과는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광명은 당쟁을 피하기 위해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강화도에 은거했지만 끝내 당쟁의 피화(被禍)를 면하지는 못했다. 이광명의 백부(伯父)는 경종 1년에 소론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이 소두(疏頭)였던 유명한 ‘신축소(辛丑疏)’의 소하(疏下) 여섯 중의 한 명인 이진유(李眞儒)였다.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몰았던 이 상소는 소론이 정권을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나 재위 4년 만에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김일경이 장살(杖殺)되는 등 소론이 몰락하고 이진유도 유배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형편이 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 조선의 유력한 가문치고 당쟁과 관련이 없는 집안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종성(宗姓: 전주 이씨)으로 불렸던 이건창의 집안은 그 중에서도 심한 편이었다. 또한 그의 가문은 이진유를 제외하면 출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깊다. 그 가문은 정종(定宗)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을 비조로 삼는데 조선 중기의 명상(名相) 이경직(李景稷)과 이경석(李景奭) 등이 그 후손들이다. 이경석은 한때 송시열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도 평생 당쟁을 조절하는 일에 힘을 기울인 명현이었으나 그의 증손 이진유가 ‘신축소’에 가담함으로써 이건창 일문의 당화(黨禍)가 시작된 것이다.
이진유는, 영조가 김일경과 목호룡 등 소론.남인 강경파만을 장살하고 나머지는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배로 그치고 정권을 이진유 등을 죽이려는 노론에서 소론으로 바꾸는 정미환국을 단행함으로써, 일단 목숨은 건졌으나 다음해 소론 강경파가 남인과 일으킨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장살되고 말았다. 이광명은 이런 당쟁이 발생하기 전에 강화도에 은거했으므로 직접적인 화는 피했지만 영조 31년에 발생한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그 자신은 함경도의 갑산(甲山)에, 광현은 기장에 유배되는 등 그 종형제들이 모두 극변으로 귀양을 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이건창의 고조(高祖) 이초원(李椒園)은 거듭되는 환란 때문에 식솔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다시 강화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초원은 벼슬에 종내 뜻을 잃어 그 손자 시원(是遠)이 대과에 급제했는데도 기뻐하지 않을 정도로 출사에 부정적이었다. 강화도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는 전주(田主)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아주 빈한했다. 그의 아들 이대연(李岱淵)의 시구를 보면 이들이 어떠한 경제 상태에 있었는지 잘 드러난다.
‘서강에서 사곡으로 돌아와 옛 살던 선포에서 낚시하다(自西江歸沙谷舊居釣魚仙浦)’란 시에서 이면백은 이렇게 읊었다.
“내 마음은 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청수를 지고 있음이 한이다. 다시 쌀과 땔감이 귀한 것을 걱정한다. (我心不在魚 但恨負淸水 更患米薪貴)”
낚시를 드리우고도 생각은 저녁 쌀과 땔감 걱정이었을 정도로 빈한했던 것이다. 이초원은 이러한 빈한함 속에서도 손자의 출사를 반가워하지 않을 정도로 당쟁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일찍이 「군자의 과오에 대한 말(君子之過說)」에서 당쟁의 원인을 밝힌 바 있으며 그 아들 대연도 「어리석은 책[?書]」에서 조선 당쟁의 근원을 밝힌 바 있는데 이건창의 <당의통략>은 사실상 선조들의 이런 학문을 집대성했다는 성격을 지닌다.
이건창 가문의 가학과 양명학과의 연관성은 앞으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의 가문은 또 역사 서술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는 사가(史家) 집안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위대한 사학자이자 실학자로서 방대한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저술한 이긍익(李肯翊)은 바로 광명의 종제인 이광사(李匡師)의 장자이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을 지으면서 객관성의 유지를 위해 고심하게 된다. 그의 집안이 어쩔 수 없는 소론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당의통략>을 저술하면서 “국조문헌을 가리켜 모두 기술한 것이요, 창작한 것은 없다.”고 한 이유는 이런 그의 집안 배경을 의식한 말이라 할 것이다.
혹자는 <당의통략>이 소론의 입장에서 쓰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의 조상 이진유가 직접 관련되었던 ‘신축소’에 관해서도 나름대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는 등 그로서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이 사실이다. <당의통략>이 상대적으로 소론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당파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이건창 자신의 학자적 견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건창은 <당의통략>에서 조선의 당쟁을 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았지만 그 자신의 실제 역사관은 조선의 양반 당인들이 지녔던 신분 위주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을 한갓 민란으로 여겨 강경 진압을 주장하다가 온건론을 주장하는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中)과 마찰을 빚어 전라도 보성으로 귀양 간 일이나, 근대성을 추구했던 갑오경장에 끝내 비판적 태도를 보인 점 등이 그러하다. 그는 전통적인 주자학 절대주의에도 반대했으나 농민들의 처지에도, 새로운 근대 사회에도 부정적 인식을 갖는 한계를 지닌 모순된 사상가였던 셈이다. 그러면서도 중인 출신 김택영(金澤榮)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등 모순이 중첩된 생애를 살기도 했다. 조선의 당쟁은 일제 사학자들처럼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도 아니며, 일부 국내 사학자들처럼 무조건적인 긍정의 대상도 아니다. 모든 사물이 그러하듯 조선의 당쟁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오늘날 계승하려 노력하고 부정적인 면은 버리려 노력하면 그만인 것이다.
조선의 당쟁이 후기 들어 그토록 치열해졌던 이유는 이건창이 원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8가지 이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창은 원론에서 조선사회 자체는 신분제 해체라는 발전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음에도 사대부들은 계속 신분제 유지를 통해 정치.경제적 특권을 독점하려 한 것이 당쟁 격화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 자신이 모순된 사상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관직은 제한되어 있는 데 양반 수는 계속 증가한 데 이유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양반 사대부 상호간의 정권을 둘러싼 자체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한 숙종 때부터 정치 공작을 통해 상대당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살육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도 당쟁을 격화시킨 주요한 원인이었다.
<당의통략>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조들을 만날 것이다. ‘당쟁’에 초점이 맞추어진 만큼 부정적 모습도 많이 드러날 것이지만 그 또한 우리 역사의 일부분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율곡의 ‘조제론(調劑論)’이 거부되면서 격화되기 시작한 조선 당쟁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정치권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당론(黨論)’이 ‘국론(國論)’보다 우선할 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를 현재의 당인(黨人)들이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책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