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부터 발해, 그리고 근대의 간도에 이르기까지 고고학적 사실과 역사적 이야기를 최신 고고학 자료와 희귀 고문헌 자료를 동원하여 알기 쉽게 설명한 발해 역사 기행“
우리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북방의 여러 집단과 교류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북방에서 밀려들어온 사람도 있었고, 우리가 북방의 각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했었다. 특히 한국의 고대문화에 보이는 다양한 북방문화의 흔적은 고고학과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 있는 주제이며 풀리지 않는 화두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북한과의 교류가 거의 끊긴 지금 남한은 한반도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륙에서 고립된 섬이 되었다. 기차나 버스로 국경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일일 뿐이 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국은 북방지역과는 떨어질 수 없었다. 우리와 북방지역의 문화교류는 크게 3가지 경로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우리에게는 익숙한 중국 동북지방(만주)와 중국북방지역과의 관계이며, 두 번째는 동해를 둘러 싸고 이웃한 러시아 극동 및 간도와의 관계이고, 세 번째는 시베리아에 광활히 펼쳐져 있는 초원지역의 문화이다. 사실 북방지역이라는 곳이 초원, 타이가, 툰드라 등 다양한 기후에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곳이다. 최근 한국에서 연해주와 연변지역에 대한 관심은 많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웃한 이 지역은 중국·러시아·북한 등 다양한 나라로 구분되어서 우리의 역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또 우리를 둘러싼 각국은 자신들의 현실에 맞는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화사관으로 만주지역이 중국사로 빠른 속도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다. 이 와중에 발해는 이제 단순한 우리 고대사의 한 나라가 아니라 최근 역사분쟁의 과정에서 야기된 문화의 아이콘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연해주와 연변에 발해만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지역은 동해를 공유하며 한반도 동해안과 선사시대 이래로 매우 친밀했었다. 후기 구석기시대 이래로 옥저와 발해로 이어지는 동안에 그들은 한국과 긴밀한 문화적 교류를 맺으며 독특한 삶을 영위해왔다. 연해주와 연변을 포괄하는 간도지역은 발해의 옛 땅인 동시에 19세기 말부터 고려인이 정착하고 또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거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 러시아, 북한으로 분리되고 변방지역으로 치부되면서 그 진면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었다. 최근에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연구로 연해주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환동해지역을 따라서 중국과는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문화를 공유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환동해지역 간의 문화교류는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부분이다. 한반도의 고대문화가 중국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 공정론에 대한 우리의 합리적인 대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북 공정과 관련된 최근의 한국 대중과 학계의 대응은 맹렬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선진문화가 전파되었다는 연구의 큰 틀은 유지된 채 국소적인 문제에만 대응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대문화가 중국에서 유입되었다는 현재의 고고학과 고대사의 연구틀이 있는 한 진정한 동북공정의 대응은 요원할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연해주·간도 지역과도 다양한 교류를 밝히고 우리문화가 다양한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서 형성되었음을 밝히는 것이 좀더 합리적인 대응이 될 수 있다.
전체 책은 크게 발해, 간도·연해주, 옥저 그리고 선사시대로 구성되었다. Ⅰ부에서는 발해와 관해서 그간 알려져있는 일반적인 사실보다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Ⅱ부는 근대 이후 이 지역에 정착했던 고려인과 러시아, 중국인들의 여러 군상을 담아냈다. Ⅲ부에서는 역사 속에서 그 이름만 알려져 있는 옥저와 읍루의 여러 모습을 담았다. Ⅳ부는 구석기시대부터 기원전 4세기대까지 선사시대 연해주와 연변지역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을 소개했다. 올해는 간도협약이 이루어진지 백주년이 된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간도는 한국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선사시대 이래로 연해주와 연변 지역은 한국사의 일부였다. 이 책 “춤추는 발해인”에 담겨진 수많은 이야기가 이 사실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의 제목을 “춤추는 발해인”으로 한 것도 단순한 고고학 관련 교양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북방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연해주와 간도가 좀 더 생동감 있고 구체적으로 대중들에 알려지기 위한 바람 때문이다
책속에서
발해의 춤은 ‘답추(踏鎚)’라고 기록돼 있다. 콕샤로프카 발해 성지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이 새겨져있다. 토기 조각 한 점에서 극동 문명의 빛이었던 발해를 떠올려 본다.
우리 민족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미 2000여 년 전부터 알려져 있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한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한번 하면 밤낮을 쉬지 않는다고 했다. 이때에 사람들의 춤은 10여 명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같이 땅을 차고 오른다고 했다. 아마 강강술래같은 집단무였을 것 같다. 음주가무 좋아하는 우리네 습관이 발해라고 예외였을까. 발해인의 음악은 주로 일본으로 사신 간 사람들의 기록에서 보인다. 발해에서 기진몽(己珍蒙) 일행이 740년 정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때 일왕이었던 성무왕(聖武王) 앞에서 발해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고대의 ‘한류’였던 발해의 음악은 곧 일본에서도 널리 유행했었고 749년에 도다이 사(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法會)에서 발해음악이 연주되었다고 한다. 발해의 음악은 송·금에도 전해져서 나중에는 송나라에서 발해음악을 금하는 법까지 내놨다고 할 정도다. 음악이 유명할진대 거기에 춤이 빠질 수 없다. 발해의 춤은 ‘답추(踏鎚)’라고 기록돼 있다. 사람들이 손을 잡고 같이 추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발해인의 춤을 실물로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200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러시아과학원이 공동발굴한 러시아 연해주의 콕샤로프카 발해 성지에서 발견된 토기에는 사람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이 새겨져있다. 이 토기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사람들이 치마를 입고 서로 손을 잡고 있다. 생긴 것만 보면 역사기록에 나오는 답추하고 유사한 듯하다. 그런데 춤을 추는 사람들의 발모양이 약간씩 다르다. 어떤 사람은 발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어떤 사람은 앞쪽으로 향한다. 아마도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는 것을 묘사한 듯 하다. 머리는 양쪽으로 뿔이 달린 게 마치 사슴의 뿔 같은 것을 머리에 단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춤을 추는 토기는 시베리아에서도 많이 출토되었다. 예컨대 서부시베리아의 청동기시대 중기(기원전 2000년기 중반)시대 유적인 자비얄로보 IA유적에서 발견된 청동무인상(靑銅舞人像)이 있다. 5㎝정도 되는 작은 청동 예술품으로 발은 약간 구부리고 손은 구부정하게 위로 들었다. 또 서부 시베리아 사무스 IV 유적에서 출토된 인물상은 발목, 무릎 등이 유연하게 구부러지고 까치발로 춤을 추는 모습이 표현됐다. 손은 허리 근처에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몸통은 사다리처럼 간략하게 표현됐다. 머리부분은 단순히 두 개의 뾰족한 선으로 표현되었는데, 아마도 뿔이 달린 모자같은 것을 쓴 모습을 나타낸 것 같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이렇게 유사한 춤을 추는 형상이 나온다는 점은 참 흥미롭다. 거기에 한국 고대부터 전해져 오는 강강술래 같은 집단 춤이라는 점은 이것이 집단적인 의례 또는 샤먼의 의식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콕샤로프카 출토 무용하는 토기는 실물자료가 거의 없는 발해의 무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토기는 발굴이 된 것이 아니라 이 성지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다. 그냥 땅위에서 발견된 것이니 혹시 발해시대가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2008년에 실제 발굴을 해보니 콕샤로프카 성지는 발해시대에만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명실상부한 발해의 토기인 셈이다. 콕샤로프카는 발해의 가장 변경에 위치한 행정중심지였다. 발해의 전성기 때에 그 세력을 연해주 중심부로 확장했고, 각지에 성지를 건설하고 행정중심지를 만들었다. 콕샤로프카는 역사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무명의 성이지만 발굴결과 발해의 중심지인 서고성이나 동경성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온돌구조가 발견되었다. 발해의 관리가 이 지역까지 파견돼 살았다는 증거다. 여기에 춤을 추는 토기가 나왔으니 이게 당시 명성을 떨치던 발해의 춤이 아니었을까?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당시 이 지역의 기층민이던 말갈족들이 발해의 무용에 매료돼 토기에 새긴 것이 아닐까? 서기 8~9세기에 발해는 극동에 최초로 세워진 국가로 선진문화를 주변 지역에 널리 전파시켰다. 그 중에는 음악이나 무용같은 무형의 문화들도 포함됐을 것이다. 무형의 문화들은 고고학적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콕샤로프카 성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무척 고마운 자료다. 토기 조각 한 점에서 극동 문명의 빛이었던 발해를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