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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_변월룡을 이 땅에 소개하기까지

프롤로그_잊을 수 없는 고국의 추억

1장 교과서 삽화를 그리던 연해주의 조선 소년
유랑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나다
천부적 재능, 예고된 화가의 길
주독야화

2장 홀로서기를 배운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 시절
주변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사건
고난의 세월
유학이 가져온 행운과 기회

3장 소련의 심장부에서 예술가의 길로
거장으로의 첫발
가족 상봉과 레닌그라드 봉쇄
사랑의 결실을 맺다
변월룡이 존경한 교수들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
레핀미술대학의 교수가 되다

4장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기다
동경하던 고국으로
평양 시절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추대되다

5장 북한미술계의 거대한 산이 되다
송정리 시절의 평양미술대학
동양화에 관심을 돌리다
모든 학과에 영향을 미치다
데생의 중요성 강조
한ㆍ중ㆍ일 서양화 도입에 관하여
한국 구상미술의 현주소
변월룡의 위상

6장 지란지교를 나눈 북한의 화가들
세 사람의 벗
화가 문학수
화가 정관철
북한미술계의 삼두마차가 되다
또 한 명의 학장 김주경
과로로 쓰러지다
북한으로 온 아내
고국을 떠나오던 날의 풍경

7장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귀국
의혹
동양화 연구에 몰두하다
소련의 한인 화가 - 봐를렌
고국을 생각하며
갈망

8장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꺾인 꿈
북한 당국의 ‘귀화’ 권유
개인 화실을 얻다
레닌그라드에서 다시 만난 정상진
소련 대사 이상조에게 희망을 걸다

9장 그리움을 그림에 담다
그림에 마음을 담다
동판화 제작에 전념하다
해외동포 고국방문단
1960년 새해를 맞다
정체성을 찾아 연해주로
연해주에서 탄생한 그림들

10장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위대한 거장
얻은 것과 잃은 것
해외 여행
사랑하는 가족
교수로서의 일상과 삶
화가로서의 삶
다양한 장르의 인물화
정관철과 북한미술

11장 타국에서 큰 별 지다
삶의 황혼기

글을 마치며_한국미술사에서의 변월룡

변월룡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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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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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미술학 박사 1호, 러시아 레핀미술대학 교수였던 서양화의 거장,
평생 조국을 그리워했던 위대한 민족화가 변월룡이 돌아온다!


한국인 최초의 미술학 박사이자 이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딛고 무려 35년 동안 러시아 최고 명문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직에 있었던 한국인이 있다. 사실주의 화가 변월룡, 그는 러시아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았으나 정작 너무나 사랑했던 두 조국으로부터는 버림 받은 존재였다.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제명되었으며, 남한 미술계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1916년, 이중섭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 다른 장르에서 미술계의 신화가 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머나먼 이국 땅 러시아에서 작품활동을 펼쳤기에 지금껏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천재 화가 변월룡. 그는 이주민의 자손으로 연해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냉전 시대의 소련 땅에서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한글 이름을 고집했고 자신의 그림마다 한글을 새겨 넣었을 정도로 한국인으로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재인 소나무를 즐겨 그렸고, 한국전쟁 후 포로교환의 현장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화로 남겼으며, 수많은 한국인의 인물화를 그렸던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는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가 진하게 배어 있다. 북한미술의 초석을 놓는 고문 역할로 1년 3개월 동안 머물렀던 고국을 평생 그리워하며,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의 먼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연해주를 찾을 정도로 고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변월룡. 그러나 그는 가슴 깊이 품은 고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그림으로밖에 담아낼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였다.
장르적으로는 유화, 판화, 데생, 수채화, 포스터에서부터 내용적으로는 인물화, 풍경화, 전쟁화, 역사화에 이르기까지, 또한 동판화와 석판화, 연필화, 파스텔화, 펜화 등 변월룡의 작품은 한 사람이 그린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훌륭하다. 그 중에서도 동판화는 변월룡이 가장 존경했던 화가 렘브란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서, 가히 한국의 렘브란트라 불려도 과하지 않은 경지에 이르렀다.
서양미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구상미술이 저물어 가던 20세기 초반에 일본을 통해 일본화된 형태로 받아들였기에 기초가 취약했던 한국 근현대서양미술의 계보에서 변월룡은 든든한 버팀목이 될 존재이다. 그의 존재와 위대한 작품들이 있음으로써 한국의 서양미술은 비로소 완성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냉전 이데올로기로 인해 우리에게 철저히 잊힌 이름이었던 변월룡, 그러나 더 이상은 잊힌 채 있어서는 안 될 위대한 거장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철저히, 밝혀내고자 한다.

한국 서양미술사의 뿌리를 세우고 기틀을 마련할 위대한 거장의 귀환

서양화의 역사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르네상스에서 사실주의까지를 나무의 뿌리로, 인상주의는 줄기로, 후기인상주의 이후를 가지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20세기 초반에야 비로소 서양화가 도입된 데다 그것도 서양이 아닌 일본을 통해 일본화된 서양화를 받아들였다. 즉, 정통 서양화 기법에 대한 단단한 기초와 체계 없이 소위 현대미술이라 일컫는 후기인상주의 이후의 유파부터 받아들인 한국 서양미술은 태생적으로 한계와 취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변월룡의 존재는 무엇보다 이렇게 허약한 한국 서양화의 뿌리를 튼튼히 해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또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통해 조국 스페인의 잔혹한 참상에 항거하고, 심지어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남길 때, 한국전쟁을 우리 땅에서 직접 겪은 우리에게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인물화나 역사화, 기록화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변월룡이라는 천재 화가의 존재가 있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이런 장르의 걸작이 나오지 못한 이유는 물론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한국 화가들의 역사 인식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실지로 그런 복잡한 구도와 웅대한 규모의 작품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화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라 하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변월룡의 발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샤갈도 입학하지 못했다는 러시아 최고 명문 레핀미술대학에서 학생으로 12년간 수학하고 미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5년간 레핀의 교수를 지낸 이 거장은 그 탁월한 실력을 고국에 관한 기록화와 인물화를 남기는 데 발휘했다. 〈북한에서〉, 〈포로 교환〉, 〈판문점〉, 〈평양 복구〉, 〈남북 분단의 비극〉, 〈남조선의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 전진!〉, 〈북조선 해방 기념일 1945년 8월 15일, 평양〉등 작품 수도 엄청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은 변월룡이 지녔던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는 수작들이다. 물론 이 그림들은 북한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의 엄연한 현실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변월룡은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를 비롯하여 문학가인 벽초 홍명희, 민초 이기영, 화가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근원 김용준, 남북의 부자(父子) ‘새박사’로 유명한 원홍구 박사 초상 등 다양한 인물화도 우리 미술계를 풍성하게 해주는 큰 요소가 될 것이다.
변월룡은 냉전 시대를 살며 남한 땅은 밟아 보지도 못한 채 북한과 짧은 시간 교류를 가졌을 뿐이지만, 그의 그림은 정치와 선동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갈 수 없는 고국을 그리워하며 평생 고국의 풍경, 고국의 인물과 아픈 역사를 화폭에 담아낸 변월룡은, 한국인의 정서를 오롯이 지닌 진정한 민족화가였다. 이 책에 실린 변월룡의 삶과 그림을 통해 그를 알면 알수록 그가 잊혔던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우리에게 이런 거장이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변월룡은 소수민족 화가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타고난 천재적 자질과 부단한 노력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러시아 내의 한인사회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한국의 얼을 드높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비록 변월룡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잠들었지만, 철저하게 한국인으로서 살았던 그의 삶과 위대한 작품을 통해 이제라도 한국미술사에서 그의 존재와 위상은 깊이 있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았고 죽어서도 한국인이기를 원했던 진정한 민족화가

변월룡은 1953년 당시 소련과 북한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북한의 초청을 받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평양미술대학의 기초를 세우고 북한의 화가들을 지도한 스승으로서 북한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던 그의 이름은 신화이자 전설로 남아야 했지만, 영구 귀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되었기에 공헌의 기록은 삭제되고 그의 흔적은 잊혀 갔다. 또한 분단으로 경직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공산국가 소련의 화가인 변월룡의 존재를 또 하나의 조국 남한에서조차 완전히 지워 버렸다.
변월룡은 1990년 5월 25일 뇌졸중으로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은 영원히 밟아 보지 못한 채, 더욱이 4개월 후면 한?러 수교가 체결되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영면에 들고 말았다. 죽기 전 남긴 유언대로 무덤 비석에는 그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고국은 그를 버렸을지언정 그는 고국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냉전 시대에 평생 남의 땅에서 한국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진정한 ‘민족화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소 한국의 소나무를 그토록 좋아했고 렘브란트를 존경해마지 않았던 변월룡, 한국인보다 더 철저한 한국인으로 살았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러시아 미술의 심장부인 레핀미술대학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작품세계와 한국미술사에서의 중요한 위치에 비해 변월룡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변월룡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에게 매료되어 10년 가까이 변월룡을 연구한 필자 문영대는 그간에도 변월룡의 이름과 작품을 알리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예술을 예술로 보지 않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따지는 행태로 인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해 완전히 잊혔던 우리 미술사의 숨은 보배 변월룡, 이제는 정치적인 이념에서 벗어나 예술이 원래대로의 가치로만 평가됨으로써, 그 이름 석자가 한국미술사에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 책을 출간한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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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0] 나는 국내에 변월룡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 미처 몰랐다. 그간 유족을 설득했던 일은 산이 아니었고, 정작 큰 산은 국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변월룡의 예술과 삶은 나에게 그만큼 신선한 충격과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도 그가 한국미술사에 자리매김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역사는 결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 글을 시작하며_변월룡을 이 땅에 소개하기까지
[P. 76] 변월룡은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자신도 모르게 훌쩍 커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에게 스베르들롭스크에서의 3년은 딱 ‘아픈 만큼 성숙한’ 시간이었다. 연약한 젊은이는 강인하게 성장했고, 피눈물 나는 노력만이 성공을 보장한다는 견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담당 교수를 통해 인간의 사랑과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깨달았다. 숱한 곡절과 희열, 추억 등을 가슴에 묻은 채, 변월룡의 스베르들롭스크 시절은 그렇게 저물었다. 그리고 미래의 ‘거장’은 레닌그라드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 2장_홀로서기를 배운 스베르들롭스크 미술학교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