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게이라서 행복하다 :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와 성 소수자 인권운동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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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김조광수의 브라보, 게이 라이프 꿈을 이루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인터뷰이 소개
인터뷰이 김조광수는 누구인가? 제작자이자 영화감독 김조광수, 그의 행복한 게이 라이프를 말한다
김조광수는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10년 동안 다녔지만 학과 공부는 팽개치고 학생운동만 열심히 했다. 1998년 청년필름을 만들어 창립작 <해피 엔드>로 칸영화제에 입성했지만 그 후에 만든 주옥같은 예술영화들, <와니와 준하> <질투는 나의 힘> 등은 줄줄이 흥행에 실패해 그는 충무로에서 가장 돈 없고 빚만 많은 제작자가 되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지치지 않고 될 때까지 계속한다’는 그의 열정과 투지는 결국 결실을 맺었다. <분홍신>과 <올드미스다이어리>로 기획력을 보여주었고 지난해 <조선명탐정>과 <의뢰인>으로 700만이 넘는 관객을 기록해 청년필름 대표로서 그리고 제작자로서의 능력을 확인시켜주었다. 2006년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한 그는 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청소년 성 소수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일에 관심이 크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거나 퀴어 퍼레이드에서 사회를 보는 것도,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2008년에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를 만들며 영화감독이 되었고, 2012년 6월 그의 첫 장편영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 관객을 만난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퀴어영화를 만들고 성 소수자 인권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그는 암스테르담 게이&레즈비언영화제 관객상, 믹스브라질영화제 감독상, 환경재단 ‘2011 세상을 밝게 만든 사람들’상 등을 수상했다.
기획의도
우리가 김조광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해방 이후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는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러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성 소수자들은 죄악시되었고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쟁취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호의 틀에서조차 소외되어 사회의 음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0년을 전후로 트랜스젠더 ‘하리수’의 등장과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그야말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음지에서 양지로 성 소수자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김조광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성 소수자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울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깨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당당함과 즐거움이었다. 밝고 즐거운 게이 김조광수는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넘나드는 성공한 제작자이자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영화감독으로, 자신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성 소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김조광수만큼 확고한 철학과 당당함을 가지고 성 소수자로 살아가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 또 있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김조광수에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다. 제작자로서 그리고 감독으로서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사회적 커밍아웃 이후 성 소수자 인권운동을 주도하면서 그는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걸까?
‘영화’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운동’만 하던 그가 어떻게 감독이 되었을까 한양대 연극영화과의 한 교수가 자신의 제자 중 절대로 영화를 할 수 없는 세 사람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김조광수였다고 말할 만큼 학창 시절 그는 영화에는 관심 없는 골수 운동권 학생이었다. 졸업 후 ‘운동의 길’에서 우연히 ‘영화의 길’로 접어든 김조광수는 그때의 경험과 가치관을 토대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현장을 비롯해 사회의 모든 차별과 불의에 항거하는 자리에 반드시 연대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겁 없이 월급제를 시행한 것도, 스태프들 스스로 정당한 권리를 찾아야 한다며 영화사에 노조를 만든 ‘위험한 짓’을 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감독이 되어 만든 단편 세 편과 첫 장편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6월 21일 개봉) 역시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제작자와 영화감독 사이를 오가는, 내일모레 쉰 살을 앞두고 있는 그들 두고 나이 값 못하는 철없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2011년 한 해 그가 이끄는 청년필름의 작품을 본 관객이 무려 710만 명이다. 한국 사회의 지배 세력이 비주류라 몰아세우는 곳에 서서 주류를 넘나들며 변화를 주도하는 그는 스스로를 즐거운 게이라 부른다.
즐거운 게이 김조광수와 성 소수자 인권운동 성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며 힘겨운 학창 시절을 보낸 김조광수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잘 알고 있다. 김조광수는 이제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맞서 싸우며 행복을 추구한다. 한 게이퍼레이드에서 김조광수는 무대에 올라가 이성애자들을 향해 외쳤다. “당신들은 우리가 골방에서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주변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을 한번 살펴보라! 얼마나 밝고 즐거운 모습인지.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 이성애자들도 여기에 끼면 행복해질 수 있다.” 김조광수는 이 책을 통해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청소년들과 성 소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은 나도 꿈을 꾸고 또 그것을 이뤄가며 사는데, 나보다 나은 조건에 있는 사람들, 바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꿈을 꾸지 못할 이유가 없고 꿈을 이루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그러니 나를 빗대어 생각해보라. 그리고 꿈을 꾸라.”
*김조광수 감독은 성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이 행여 바깥표지의 제목 때문에 책 읽기를 주저하지 않을까 싶어 안표지에는 “난 달라 그래서 행복해”라는 제목을 넣자고 제안했다. 출판사도 이에 흔쾌히 동의해 바깥표지와 안표지의 제목을 다르게 제작했다.
책속에서
[P.29-30] 남남 러브스토리를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 도혜 : 나이 마흔셋에 어떻게 영화감독이 될 생각을 했나? 연극영화과를 졸업했고 영화도 계속 제작해왔으니 못할 일도 아니고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연출에 뜻이 있었다면 왜 조금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나? 광수 : 제작자로 10년 동안 일하면서 연출을 하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 영화 연출은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감독이라는 사람들은 감독으로 애초에 그렇게 태어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청년필름에서 오랫동안 여러 감독들 그리고 프로듀서들과 영화를 만들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직접 연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 그리고 그 생각은 ‘나라고 못할 것 없지 않나?’가 되었고, ‘내가 원하는 스태프들과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로 발전했다. 내가 늘 그렇듯이 ‘그럼 한번 해볼까?’ 하는 식으로 갑자기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어보니까 내가 원하는 걸 직접 만든다는 희열이 컸다. 프로듀서로 참여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쌓아두었던 어떤 것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군대에 다녀온 이후 계속 나는 내가 속한 곳에서 제일 윗사람이거나 대표였다. 리더의 역할이 내 기질과 맞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늘 허전했다. 내가 직접 실무 경험을 못 해보는 것, 큰 틀을 짜고 계획은 세우지만, 내용을 채우거나 현장에서 실무를 보는 사람과 언제나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게 허전했다. ‘기획자의 헛헛함’이랄까, 그게 쌓여서 연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 같다.
[P. 40-41] ‘재미’와 ‘교육’ 사이에서 도혜 : 작품을 통해 재미를 주면서 어느 정도 교육의 기능도 하겠다는 건데, 사람들에게 정말 알리고 싶은 것들은 무엇인가? 광수 : 첫 번째는 우리 사회에도 행복한 이반(이성애자들을 ‘일반一般’으로 일컫는 것과 구별해서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로, 한자로는 ‘異般’ 또는 ‘二般’이라고 쓴다)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이반들이 ‘아, 나도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으면 한다. 보다 중요하게는 일반들이 이반의 삶과 사랑을 대할 때 그들의 어두운 현실을 보면서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동성애자들의 삶은 차별과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대부분이고, 동성애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시각을 가진 관객은 이들과 함께 슬퍼할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이런 패턴을 깨고 싶다. 내가 정말 싫은 것은 그런 내용의 영화는 이반은 이반대로 극장에서조차 또다시 그런 아픈 현실을 목도하게 하고, 일반은 일반대로 ‘그래, 너희들 힘들지, 내가 도와줄게’ 하는 온정주의적 시선을 갖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들은 불행하고, 우리는 행복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쓰이는 게 가장 안 좋은 경우인데, W 같은 프로그램이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W는 세계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주는데, 오히려 그것을 통해‘우리는 저렇게 살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길 수 있다.
[P. 73-74] 첫사랑,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 도혜 : 선생님 말고, 또래가 등장하는 첫사랑 이야기가 기대된다. 광수 : 중학교 3학년 때다. 5월이었는데 학교 뒤편 언덕으로 난 오솔길로 가끔씩 혼자 산책을 가곤 했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가 진동하는 그 예쁜 길이 끝나는 곳에 체육관이 있었다. 나는 체육관 2층의 작은 창을 좋아했다. 색색의 유리로 장식된 그 창이 왠지 신비로워 보여서 그 방에 들어가보려 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도 가질 수 없어서 더 마음이 가는 그 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이 열리더니 어떤 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나보다 얼굴이 더 희고 눈은 더 까만, 말 없는 우리 반 아이 해성이였다. 바다 해, 별 성. 촌스러운 내 이름 광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정만화에서 똑 떨어져나온 것 같은 아이. 우리는 굳은 얼굴로 서로를 한동안 바라봤고, 해성이는 내 마음으로 쏘옥 들어왔다. 그날 밤 나는 홍역을 앓듯이 열이 올랐다. 며칠을 학교에 못 갈 정도로 계속 아파서 누워 있는데 엄마가 친구가 찾아왔다며 나와보라고 하셨다. 설마 했는데, 해성이었다. 선생님께 주소를 물어서 찾아왔다며 수줍게 웃고 있더라. 해성이 손에 들려 있던 황도 통조림. 그날부터 나는 일기장에 해성이의 이름을 가득 쓰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세 달을 혼자서 가슴앓이하다가 용기를 내어 고백했다. “해성아, 나 너 좋아해”라고. 그러고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신발만 쳐다봤다. 그런데 들릴 듯 말 듯한 수줍은 목소리로 해성이가 대답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나 일주일 뒤에 호주로 이민 가.” 우리 사랑에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