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변화의 출발점에 서다 술과의 전쟁 시험대에 오른 글라스노스트 경고음이 울리다
Chapter 12 새로운 세계관 위기에 처한 제네바 정신
Chapter 13 지도부 균열 저서《페레스트로이카》출간 옐친과 나 과격 세력의 저항 양극단의 협공 받는 페레스트로이카
Chapter 14 신사고 헌장 다당제로의 길을 열다 봇물 터진 독립선언 8월 쿠데타 연방 사수를 위한 최후의 안간힘 연방 해체를 위한 옐친의 비밀작전 벨라베자 음모
에필로그 해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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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2013 전세계 동시출간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 <선택> 출간 인간 고르비의 어떤 면모가 그를 대변혁의 길로 내몰았는가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뼈속까지 사회주의자였던 고르바초프의 어떤 철학과 삶이 그로 하여금 대변혁의 결단을 하게 만들었을까? 지금도 많은 이들이 개혁과 개방의 길을 선택한 고르바초프의 내면의 결단에 관심과 의문을 갖고 있다. 삶의 어떤 면이 그의 정치적 선택에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것일까? 바로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아내 라이사와 함께 한 삶에 이 책을 바친다고 했다. 라이사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일생을 통해 일관된 가족에 대한 헌신. 진정한 사회주의의 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고뇌와 반성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는 우리가 아는 얼치기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오직 인간의 존엄과 무너져 가는 체제의 회생을 최우선시한 지도자였다.
크렘린 권력의 무서운 맨얼굴
일개 지방의 지도자에 불과했던 시골뜨기 정치인 고르바초프가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서열과 출신성분이 엄격한 소련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이 책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지성, 낙관론, 지칠 줄 모르는 활력, 달변,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민첩성과 수완 외에도 쿨라코프, 안드로포프, 수슬로프 등 당대 실세들과의 연줄을 쌓아가는 영리함이 그의 무기였다.
이 책은 또한 브레즈네프 사망 직전부터 고르바초프가 소련대통령 사임 때까지 철의 장막 뒤에서 벌어진 권력투쟁 이면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 지도자들의 부침과 대권을 둘러싼 세력 간 합종연횡과, 음모와 배신 등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 천의 얼굴을 한 권력의 맨얼굴과 감춰진 음모와 비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인 한소(韓蘇) 수교와 88서울올림픽 소련참가도 고르바초프 때 성사됐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남다른 인연이라 하겠다. 고르바초프의 최측근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핵심적 역할을 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후일 회고담에서 수교와 올림픽 참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고르바초프와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 및 야코블레프 3인이 합의해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으로 밝혀지는 소련 연방해체 과정의 진실, 엘친과의 악연
목숨을 건 싸움에 도전했다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벗어날 수는 없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했던 고르바초프도 최종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실패한 비운의 개혁가란 낙인을 떨쳐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시장경제와 민주화의 주춧돌을 놓았고, 냉전 해체와 세계평화 구축에 획기적인 역할을 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 자서전은 고르바초프란 개인을 보다 잘 이해하게 하고, 특히 80년대 전후의 소련 내부 사정과 연방 해체 과정에서 석연치 않았던 많은 부분들을 해소시켜 준다.
[해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인의 자화상 김흥식 (전 연합뉴스 모스크바특파원)
소련의 마지막 당서기장이며 소련의 최초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20세기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국내와 국제사회에 일대전환을 가져온 그의 역할과 행동이 끼쳤던 영향이 워낙 크기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시기에 나온 고르바초프의 자서전은 라이사 여사와의 절절한 사랑을 포함해 권력을 둘러싼 그의 격정적 생애와 그가 거둔 승리와 패배, 특히 페레스트로이카 추진 과정과 소련 종말에 이르는 극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물론 책의 성격상 자기변명이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우리로 하여금 고르바초프란 인물에 대한 평가를 보다 신중하게 만든다. 지금까지의 평가를 대체로 보면 한쪽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 취임이후 강력히 추진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문자 상의 의미로는 ‘재건’)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정교하게 준비하지 못한 채 밀어붙이다 실험에 그쳤을 뿐이고, 결국에 가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게다가 동구권을 고스란히 서방에 넘겨준 ‘배신자’ ‘매국노’, 심지어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에 비유되는 등 온갖 수모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한마디로 실패한 개혁가에 불과한 인물이고 인민들이 겪고 있는 시련이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로 옛 소련권과 러시아에서 비판적이다. 또 다른 쪽(특히 서방)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이니셔티브를 쥐고 평화,군축외교를 전개, 2차 대전 종전 이래 지속돼 온 냉전체제를 종식시키고 독일통일과 동유럽 공산국들의 민주화를 위해 핵심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후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역할로 인해 서방 각국의 여론조사에서 그 나라 지도자보다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고르바초프와의 면담을 추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르바초프가 서방에서 얼마나 사랑과 찬사를 받았는지는 미국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 ‘타임’지의 보도에서 잘 나타난다. 이 잡지는 1987년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소련의 새 세대에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점을 들어 고르바초프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이어 1989년에는 ‘80년대에 가장 중요한 사변들을 일으킨 배후인물이며 냉전을 종식시킨 장본인’인 고르바초프를 한해의 인물로 뽑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1980년대의 인물’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악의 제국’의 지도자가 마치 서방의 ‘아이콘’과 같은 찬사를 받은 셈인데 역사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방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결국 실패한 비운의 개혁가이자 과도기적 인물에 그쳤다. 그 자신이 소련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나는 씨앗을 심지만 수확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사회의 개혁에 필요한 여러 씨앗을 많이 심어 두어야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라고 했는데 마치 자신에 닥칠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한 말이다. 그의 실패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일반적으로 야심차게 추진했던 개혁이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은데다 오히려 사회혼란과 국민 불만을 부추겼으며 급기야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자서전에서도 어느 정도 밝히고 있듯이 소련국민들이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사회주의의 휴머니즘적 이상에 의해서 또다시 감동되고 체제 자체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개선되리라는 낙관론적 믿음을 전체로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산주의가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개혁의 노력에 따라 바뀌어 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한 온건적 개혁노선은 급진파에 의해 압도될 운명이었다. 흔히 덩샤오핑 주도의 중국 개혁이 성공한 것과 비교해 고르바초프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중국의 경우 문화대혁명 이후 정치적, 경제적 쇼크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밑바닥에서부터 개혁의 시동을 거는 게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면 소련은 약 20년에 걸친 브레즈네프 통치기를 거치면서 상당히 안정 상태에 있었고 따라서 변화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고르바초프로서는 변화에 맹렬히 저항하는 당료들과 항상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와중에 개혁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말았던 것이다. 두 나라의 산업구조가 현격히 다른 점도 개혁추진에 영향을 미쳤다. 소련은 지나치게 공업화돼 있었다면 중국은 인구의 4분의 3이 농업종사자들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농민에게 약간의 사유재산권을 부여함으로써 손쉽게 농업분야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반면 군수분야와 중공업 위주의 소련 산업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컸고 가만히 앉아서 개혁을 당하고 있지 않을 만큼 강력한 조직들이었다. 소련의 종말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며, ‘지나칠 정도로 확실하게 예정된 붕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즉 고르바초프 개인의 정책적 실수 탓으로 돌리기는 무리라는 말이다. 1980년 초의 소련은 지구촌 어느 나라도 이 나라만큼 생기를 잃은 나라는 없을 정도로 정체돼 있었다. 1964~82년 브레즈네프 통치기간 변화를 완강하게 거부했고 순환인사가 거의 없는 철밥통 체제로 유지됐다. 러시아 남자의 평균수명이 63세였던 시절에 정치국원들의 평균연령은 70세를 웃도는 장로정치로 일관됐다. 고르바초프 이전의 소련은 그야말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브레즈네프 사후 후임자들인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통치기간이 각각 겨우 1년 남짓에 불과한 사실이 여실히 보여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르바초프는 당서기장에 취임하자마자 소련의 당면 위기를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소련 사회에 내재된 숱한 불합리와 불평등, 추악한 현상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본질적인 변화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낙관적 의도와는 너무도 달랐다. 페레스트로이카에 저항하는 당료들의 끊임없는 방해공작, 보수파와 급진파의 협공, 정치국 동료들의 배신 등으로 고르바초프는 기진맥진해 갔다. 특히 옐친 주도하에 러시아를 비롯해 각 공화국들이 민족주의와 주권선언 기치를 내걸며 연방정부에 재정지원을 끊고 각 공화국들이 앞 다퉈 루불화를 남발해 극도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1991년에 이르러 쿠데타까지 발생하는 등 파국을 맞으면서 종말의 끝을 향해 달려간 형국이 됐다. 그런 과정들이 고르바초프의 자서전에서 세세히 언급돼 있어 당시 사정을 짐작케다. 일개 지방의 지도자에 불과했던 시골뜨기 정치인 고르바초프가 그토록 빠른 시간 내에 서열과 출신성분이 엄격한 소련에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는 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의 장점인 지성, 낙관론, 지칠 줄 모르는 활력, 달변,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민첩성과 수완 외에도 쿨라코프, 안드로포프, 수슬로프 등 당대 실세들과의 연줄을 쌓아가는 영리함이 돋보인다. 이 책은 또한 브레즈네프 사망 직전부터 고르바초프가 소련대통령 사임 때까지 철의 장막 뒤에서 벌어진 권력투쟁 이면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곳곳에서 지도자들의 부침과 대권을 둘러싼 세력 간 합종연횡과, 음모와 배신 등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담겨 있다. 단순한 흥미차원을 넘어 천의 얼굴을 한 권력의 진면목과 감춰진 비밀들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고르바초프 입장에서 씌여진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이 책은 특히 고르바초프와 고려인과의 각별한 인연을 소개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스타브로폴 지방당 서기로 재직 중이던 어느 날 일단의 고려인들이 찾아와 계약재배조건으로 양파농사를 하겠다고 요청했다. 총생산량 가운데 표준량 이상을 국영농장에 납부하는 대신 나머지는 자신들이 마음대로 처분하게 해 달라는 조건이었다. 이에 따라 열심히 양파농사를 지은 고려인들은 국영농장보다 획기적으로 수확을 늘렸고 자연히 이들의 수익도 짭짤했다고 한다. 소문이 나자 고려인들의 양파농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일하게 해 달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앙당국은 사회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불법적 약탈’이라는 이유를 들어 고려인들을 추방해 버렸다. 나중에 이곳을 방문한 코시긴 총리는 이 사건의 추이에 깊은 관심을 표시했다. 고르바초프는 총리에게 고려인들이 양파농사를 지을 때는 스타브로폴에서 주민 소비량을 능가할 정도로 양파가 넘쳐났으나 그들이 추방된 이후로는 국영농장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타 지역에서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대답했다. 이 일로 개혁성향의 코시긴 총리와 고르바초프는 농업의 문제점과 노동생산성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대목도 나온다. 역사적인 한소(韓蘇) 수교와 88서울올림픽 소련참가도 고르바초프 때 성사됐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남다른 인연이라 하겠다. 고르바초프의 최측근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핵심적 역할을 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는 후일 회고담에서 수교와 올림픽 참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고르바초프와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 및 야코블레프 3인이 합의해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면서 세상을 바꿔 놓았던 고르바초프는 역사가 그에게 맡긴 사명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나오더라도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 역사의 페이지를 다 쓴 사람”이란 야코블레프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타당하다. 목숨을 건 싸움에 도전했다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벗어날 수는 없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했던 고르바초프도 최종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 비운의 개혁가란 이미지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 과업으로 남겨 놓더라도 러시아의 시장경제와 민주화의 주춧돌을 놓았고 세계평화 구축에도 획기적인 역할을 한 인물임에 는 틀림없다. 이 자서전을 통해 고르바초프란 개인을 보다 잘 이해하고, 특히 80년대 전후의 소련 내부 사정과 연방 해체 과정에서 석연치 않았던 많은 부분들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책속에서
…그래서 어머니는 크렘린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우리 부부는 돌아가며 어머니를 찾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 나는 혼자서 갔다. 우리는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 늦게 헤어졌다…. 어머니는 이튿날 새벽 4시에 돌아가셨다. 운명하기 전에 의사들이 나한테 남길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다. “그 애가 다 알아요.” 프롤로그
(2000년 9월 21일에 쓴 일기)
라이사가 떠난 지 1년이 지났다. 오늘은 아내의 묘소에 묘비가 세워지는 날이라 가족과 친지들이 아내의 무덤에 모두 모였다. 비석은 조각가 프리드리히 소고얀의 작품이다. 알록달록한 대리석 비석은 표면이 마치 꽃으로 장식한 돌판 같았다. 아주 큰 돌이었다. 비문은 이렇게 쓰여졌다.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32년 1월 5일 태어나 1999년 9월 20일에 잠들다.’ 라이사를 빼닮은 젊은 여인이 몸을 구부리고 묘비에 야생화 다발을 놓았다. 벌써 1년이 지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1년이었다. 사는 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여러 달 동안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딸 이리나와 외손녀 크세냐, 아나스타샤, 그리고 친구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라이사가 떠난 다음에는 몇 달 동안 강연 일정도 모두 중단하고, 그저 다차에 처박혀 있기만 했다. 그처럼 지독한 고독감은 전에는 정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라이사와 나는 50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늘 꼭 붙어서 지냈지만 한 번도 서로 지루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 우리는 그저 행복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둘이만 있을 때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한 적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젊은 시절에 시작한 사랑을 끝까지 키워나간다는 언약을 굳게 지키며 살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라이사의 죽음에 대해 나는 너무 큰 죄책감을 느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왜 아내를 지켜내지 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하며 온갖 기억을 다 되살려내 보았다. 우리가 겪은 일들이 나중에 라이사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런 양심도, 책임의식도 없는 사람들이 나라의 권력을 차지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아내는 가끔 그 일을 입에 올렸고, 그러면 나는 늘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면 아내는 이내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보면 나는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아내와의 마지막 시간이 된 9월 19일부터 20일 사이의 밤을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아내는 1999년 9월 20일 새벽 2시 57분에 눈을 감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 없이 눈을 감았다. 서로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아내는 자기 여동생 루드밀라로부터 줄기세포 이식수술을 받기로 한 날을 이틀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모스크바의 혼인등록소에 가서 혼인신고를 한 지 46주년을 닷새 앞둔 날이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내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도저히 아내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이리나와 나는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 앉아 하염없이 아내를 불러댔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소리쳤다. “여보, 자카르카, 가지 마, 내 말 들려?” (나는 집안에서 아내를 자카르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손을 꼭 쥐면 아내가 나의 애원에 응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라이사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앓아눕기 전에 아내와 나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수시로 이야기했다. 한번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없으면 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어때요? 아마도 당신은 내가 죽으면 다른 여자와 재혼해서 살겠지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누가 죽는다고 그래. 당신은 아직 젊어. 거울을 한번 보라고. 사람들이 하는 말도 못 들었어요? 당신은 너무 지쳐서 좀 쉬어야 하는 것뿐이라고.” 그러면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다. “노인네가 될 때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요.” 손녀가 태어나자 얘들이 자기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를 놓고 우리는 머리를 짜냈다. 아내는 바불랴라고 불러 주면 좋겠다고 했다. 직역하면 ‘작은 할머니’란 말이다. 흔히 하는 것처럼 바부시카라고 부르면 너무 늙고 병든 할머니가 연상되어 싫고, 바불랴라고 하면 그나마 좀 젊고 생기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내는 우리가 서로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꿨다. 점점 더 불안해했다. “그만 하고 돌아가고 싶어요.” 여행길에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고 장거리 여행 때는 자기가 내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를 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혼자 남겨 놓고 떠나면 더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날 밤 딸 이리나와 나는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서서 울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2001년 1월 5일에 쓴 일기)
라이사의 생일이다. 살아 있으면 69세가 된다. 장래 이야기를 하면 아내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더도 덜도 없이 새로운 세기와 새천년이 시작될 때까지만 살고 싶어요.” 아내는 새천년이 시작되기 석 달 전에 눈을 감았다. 아내는 2000년 새해를 영원히 기억될 방식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때까지 이리나와 손녀들은 파리 구경을 한 번도 못해 봤다. 그래서 우리는 2000년 새해를 아이들을 데리고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도시의 샹젤리제 거리로 가서 맞이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새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그 끔찍한 일이 닥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리나와 아이들과 함께 파리 여행을 예정대로 했다. 라이사가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노보데비치 묘지로 갔다. 꽃을 한 아름 안고 갔다. 정교회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밤에는 눈이 왔다. 나는 라이사가 제일 좋아하는 빨간 장미를 가져갔다. 그날 묘지에서 본 장면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묘비를 덮은 희디흰 눈 위에 빨간 장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벽에는 아내의 큰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집안 곳곳에 꽃과 촛불이 장식되어 있고, 예쁘게 장식된 성탄 트리가 놓여 있고, 트리 향이 집안에 퍼졌다. 식탁에는 아내가 손님맞이 할 때 내놓곤 했던 음식을 차려놓았다. 시베리아식 펠메니 수프와 아방가르드 파이를 곁들인 러시아 디너였다. 크렘린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파이인데, 아방가르드란 이름은 아내가 붙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선 채로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었다. 저녁을 마친 다음 서재로 갔다. 전등을 모두 끄고 창가에 섰다. 다차 마당에는 야간등이 켜져 있고, 우거진 숲 위로 소리 없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볼쇼이극장에서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를 앞둔 제야는 볼쇼이극장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면 새해 선물을 주고받았다. 산타크로스는 대통령궁의 경비가 아무리 삼엄해도 어김없이 선물을 갖고 왔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졌다. 이런 기억들은 이제 모두 지나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내와 내가 함께 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라이사는 러시아의 겨울을 무척 좋아해서 눈보라 속에서 밖으로 나가 걸어 다니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스타브로폴에 살 때부터 그랬는데, 한번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을 뻔한 일도 있다. 그런 습관은 모스크바로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아내는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과 젊은 시절을 모두 그곳 시베리아에서 보냈다. 가족 모두 철도 노동자로 일했는데, 북부 우랄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여러 해를 보내기도 했다. 그 시절 라이사와 제냐, 류도치카, 어린 세 자매는 양털가죽 코트에 돌돌 싸인 채 썰매에 태워져 이사를 다녔다. 길고 긴 시베리아의 겨울밤 가족은 펠메니를 끓여 자루에 넣어 바깥에 내놓았는데, 그러면 펠메니는 꽁꽁 얼어붙었다. 펠메니는 라이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아내의 마지막 날들이 생각난다. 아내는 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고, 의사가 지시하는 대로 꿋꿋이 견뎌냈다. 나는 눈뜨고 지켜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견디지 못할 지경이면 아내는 나와 딸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도저히 해답을 구하기 힘든 물음에 답을 구하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7월 19일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아내를 병실로 데려갈 때 나도 따라 들어갔다. 내 눈을 쳐다보면서 아내는 이렇게 물었다. “의사가 뭐라고 해요?” 아내의 상태를 알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심각한 혈액병이라고 해요.” “이제 끝인가요?” 아내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아니요. 내일 독일로 가서 진찰을 더 받아볼 예정이오. 그래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치료 방법을 정하기로 했어요.” 라이사의 병을 고치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뮌스터로 날아갔다. 9월 21일에 돌아올 때 라이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이승에서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나는 우리의 삶에 대해 책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로서는 너무 쓰기 힘든 책이었다. 이 책에는 나와 우리 부부가 살아 온 삶에 대한 회고와 추억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