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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Gorgias

447a~e 소크라테스 일행이 칼리클레스의 집을 방문하다
447c~461b 고르기아스와 나눈 대화
447c~449c 고르기아스의 기술: 수사학
449c~451a 수사학은 말하기이다
451a~453a 수사학은 설득과 힘이다
453a~455a 수사학적 설득의 기능
455a~461b 고르기아스적 수사학의 문제점들
461b~481b 폴로스와 나눈 대화
461b~463a 소크라테스의 수사학 비판: 수사학은 환심을 사기 위한 아첨이다
463b~466a 아첨의 여러 가지 형태
466a~468e 힘에 대한 비판: 연설가들과 참주들은 왜 힘이 약한가?
468e~470e 힘에 대한 비판: 정의가 왜 이득과 행복을 확보하는 관건인가?
471a~472c 막간극: 수사학적 논박과 문답법적 논박
472d~476a 불의를 행하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476a~479e 처벌받지 않는 것이 처벌받는 것보다 더 나쁘다
480a~481b 수사학은 친구들은 처벌받게 하되 적들은 처벌받지 않게 하는 데 써야 한다
481b~527c 칼리클레스와 나눈 대화
481b~482c 칼리클레스의 반론
482c~486d 자연의 정의와 법의 정의
486d~488b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88b~491d 누가 더 훌륭하고 더 우월한가?
491d~492e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힘에 대해 칼리클레스가 논하다
492e~494e 소크라테스의 비판(1): 물이 새는 항아리의 비유
495a~497d 소크라테스의 비판(2): 쾌락과 고통은 공존할 수 있으므로
쾌락주의는 거짓이다
497d~499b 소크라테스의 비판(3): 쾌락주의가 진실이라면 용기와 지혜는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499b~500a 칼리클레스가 쾌락주의를 포기하다
500a~503d 좋은 수사학과 나쁜 수사학의 구분: 아첨으로서의 수사학 비판
503d~505b 좋은 수사학과 나쁜 수사학의 구분: 혼 안의 질서와 정의와 절제
505b~506c 막간극: 칼리클레스가 토론에서 발을 빼다
506c~509a 소크라테스가 행복은 절제와 정의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요약하고 설명하다
509b~c 힘: 우리에게 가장 해로운 것을 물리치지 못하는 무능이야말로
가장 수치스럽다는 데 칼리클레스가 동의하다
509c~511a 힘: 참주들이나 현 정권의 친구 되기
511a~513 수사학: 자기 보존이 목표라면 연설가에게는 아첨이
유일한 선택이다
513c~515b 정치학: 정치가를 시험하는 진정한 시금석은 동료 시민들을
더 훌륭하게 만들었느냐이다
515b~519a 정치학: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기타 아테나이의
유명 정치가들은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519a~520e 정치가와 소피스트의 유사점
521a~522c 정치학: 소크라테스야말로 아첨으로 연명하지 않는 아테나이의
하나뿐인 진정한 정치가이다
523a~524a 신화: 사후 심판의 설화
524a~525d 신화: 처벌이 혼에 이득이 되는 방법
525c~527a 신화: 정치가들을 기다리는 운명과 철학자들을 기다리는 운명
527a~e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내용 전체를 요약하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309a~310a 액자(額子) 대화
310a~311a 힙포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를 방문하다
311b~314b ‘소피스트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가 힙포크라테스와 토론하다
314b~316a 소피스트들이 칼리아스의 집에 모이다
316a~319a 프로타고라스가 자기 직업의 본성을 설명하다
319a~320c 소크라테스가 인간의 미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지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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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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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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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플라톤의 저술이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겪고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심오하고 체계적인 사상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사상을 극적 상황, 등장인물들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 늘 고정(출연)인 주연배우 소크라테스의 인간미 넘치는 아이러니 등이 빚어낸 재미와 생동감이 독자들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철학자 플라톤은 그리스 최고의 산문작가의 한 사람으로서의 명성 또한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상은 그들의 역사다. 우리 독자들에게 플라톤이 두루 읽히기 시작한 역사는 아주 짧다. 최근의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한글이 언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역사가 길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인 외세의 잦은 도발로 지금도 우리의 언어주권 또한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이 번역이건 창작이건 우리말로 집필된 모든 글들은 우리말로 새로 태어난 우리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최근 들어 천병희 교수의 고전 원전번역이 플라톤의 대화편들에 집중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2012년)은 신호탄이었다. 『국가』(2013년)에서 큰 획을 긋고, 『파이드로스/메논』에 이어 이번엔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다. 원전이 간직한 의미를 되도록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우리말로 옮기는 쉽지 않은 작업에 고시 준비생처럼 열정을 쏟고 있다. 명품 공연이 늘 새롭게 해석되어 새로운 무대에 오른다. 그처럼 천병희 교수는 이번에도 옮긴이 서문에서 ‘더 나은 이해를 위해 플라톤의 번역은 끊임없이 시도되어야 한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담담하게 툭 던지는 말인 듯한데 곱씹을수록 시사점이 적지 않다. 다음 작품은 뭘까? 궁금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왜 하필 지금 플라톤을, 왜 『고르기아스/프로타고라스』인가? 희랍 라틴 원전번역의 노장은 우리나라와 우리말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출간 그 자체로 무언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있어야 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 [고르기아스]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의 대가 고르기아스에게 정면도전을 하는데, 그의 대화는 여느 대화편들과 달리 솔직하다. 그리고 명쾌하다. 수사학이 무엇인지 정의해달라고 한다.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이 왜 가장 중요한 인간사인지를 역설한다. 정치가로서의 성공은 연설로 설득하는 요령이 달려 있다. 어느 한 분야만 깊이 파는 전문가의 조언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성공하는 연설가는 옳고 그르고를 떠나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단다. 한데 소크라테스에게 ‘수사술’이란 기껏해야 대중의 기분을 맞추는 아첨일 뿐이다. 나아가 소크라테스에게 정치는 ‘대중들의 귀에 솔깃한 말만 골라 하는 아부의 연설이 아니라’ ‘온 국민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도덕적 논변’이라야 한다.
고르기아스가 한 발 물러나고 그의 제자 폴로스가 토론을 잇는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적 수사학은 정치술에 불과하다, 지성이 결여된 연설의 힘은 크지 않다는 논리를 편다. 이어 폴로스를 상대로 자신의 도덕 원리를 전개한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나쁘고 비참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나으며, 불의를 행했으면 처벌받지 않는 것보다 처벌받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수사학은 친구들은 처벌받게 하는 데, 그리고 적들은 처벌받지 않게 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것, 대단한 역설이다. 그러므로 수사학은 불의를 고발하고 제거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에 폴로스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이제 토론에서 발을 빼는 폴로스f를 대신해 칼리클레스가 토론을 이어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독일 철학자 니체(F. Nietzsche)를 연상케 하는 젊은 소피스트와 길고 긴 논쟁을 시작한다. 칼리클레스는 단도직입으로 주장한다. 미덕과 행복은 가능하다면 법을 무시하고 권력의지를 실현하는 데 있다! 법의 정의가 아니라 자연의 정의를 따라야 한다. 법보다는 힘을 가진 이가 주도하는 세상이 ‘정상’이란다. 또한 그는 주장한다. 절제와 정의 같은 덕목이야말로 가장 추악한 것이다. 욕망을 억제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몸과 영혼의 이원론자 소크라테스에게 몸이란 영혼이 잠시 머물고 있는 여인숙과 같다. 쾌락을 위해 영혼을 파는 일은 어리석고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영혼의 평화가 가장 중요한 그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사태다.
갑자기 토론은 [칼리클레스가 옹호하는] 정치가의 활동적인 삶이냐 [소크라테스가 대변하는] 철학자의 삶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다. 소크라테스에게 건네는 칼리클레스의 충고는 거칠지만 아프다. 시민들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중단하고 그들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며 부귀영화를 추구하라, 그러지 않으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당시 아테네인들의 상식적 사고를 존중하며 발언하라는 충고다. 사형이 선고되던 아테네의 한 법정을 떠오르게 한다. 결과적으로 되새길 만한 것이었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묻는다. ‘지금까지 자네는 시민들 중에서 누구를 훌륭한 인간으로 만든 적이 있는가?’ 국민이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정치가가 할 일이 아닌가?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삶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지난날 아테나이의 유명 정치가들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밀티아데스 등의 업적을 깎아내린다. 마침내 ‘아테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훌륭한 정치가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선포한다. 칼리클레스와 거친 논쟁에서, 제국 아테네와 현자 소크라테스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불화가 있음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대화편의 끝에는 사후에 혼이 심판받는 신화가 나오는데, 불의를 행하지 말라는 거듭되는 경고로 다가온다. 신화에서 처벌이 혼에 이득이 되는 방법은 독특하다.

# 2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자네 어디서 뭘 하다 오는 길인가?”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소크라테스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동주연은 프로타고라스라는 점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로부터 한수 배우기를 열망하는 지인을 앞세워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소피스트라는 직업의 정체성부터 묻기 시작한다. 대화의 장에 합석한 당대 내로라하는 소피스트들의 면면도 그렇거니와 훗날 재판정에 선 소크라테스 자신의 죄목 가운데 하나가 소피스트 혐의였다. 예사롭지 않은 출발이다. 그러나 삼십대 후반의 혈기방장한 소크라테스에게 60대 초반의 프로타고라스는 당당하게 자신은 훌륭한 소피스트라며, 자기 직업의 본성을 설명한다. 아테네 진영과 스파르테 진영의 27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몇 개월 전인 기원전 432년의 어느 날 펼쳐진 이 논쟁으로 소크라테스는 철학 무대에 공식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언을 남긴 노장 프로타고라스와 신예 소크라테스의 대결. 탐색전에 두 사람은 ‘미덕(arete)은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시작한다. 프로타고라스에게 미덕이란 가르칠 수 있고 가르쳐야만 하는 일종의 지식이다. 두 사람은 치열한 공방을 벌인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에게 징계는 미덕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는 보편적인 신념이다. 더구나 미덕은 특정 전문가가 아니라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 이에 맞서 미덕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며 교육의 무의미를 설파하는 소크라테스, 그는 상대방을 시험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무심코 용기와 정의와 지혜를 서로 다른 덕이라고 대답한다. 집요하게 퍼붓는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세에 그가 걸려든 것. 지혜롭지 않은 자도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면, 곧 용기가 지혜와 다른 별도의 미덕이라면 ‘미덕은 가르칠 수 있다’는 자신의 발언은 모순이다. 최고의 지성이라 자부하던 프로타고라스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 못할 수모를 겪을 판인데, 그는 답변 방식을 바꿔 연설체의 긴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둘은 모든 미덕은 본질적으로 ‘좋음’에 대한 지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따라서 미덕은 사실상 지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미덕은 부분들로 구성되는가? 그럴 경우 부분들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정의와 경건, 지혜와 절제 등의 상호관계를 검토한다. 이어 프로타고라스는 ‘훌륭한 사람’을 찬양한 시모니데스의 시를 비판하고 소크라테스가 반론을 제시하는데 일부러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없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안으로 좋음에 관해 둘은 다시 토론을 시작하고, 지혜와 용기와 관련하여 프로타고라스의 견해가 심도 있게 토론된다. 두려워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지혜가 없는 자가 보이는 용맹은 만용으로, 이런 무모함을 용기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용기도 미덕을 이루는 지혜, 분별, 정의, 경건과 같은 한 부분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도 용감할 수 있다는 프로타고라스의 견해는 용기와 지혜의 상호관계를 인지하지 못한 오류이다. 논리에 밀린 프로타고라스는 결국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동안 젊은이들에게 덕을 가르쳐왔다고 자부해온 프로타고라스, 사실은 미덕의 본질은 지혜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토론은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마무리된다.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할 줄 아는 솔직한 지성인으로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논쟁에 성실하게 임하며 소크라테스가 가끔 던지는 신랄한 말에도 흥분하지 않는 차분함을 보여줬다. 소크라테스의 논의가 탐색적이며 때로는 역설적이기까지 하다면 그가 펼친 논의는 사려 깊고 상식에 근거하고 있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지나간 비행을 응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다시는 비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 3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을 필라소피아(philosophia)라고 불렀다. ‘사랑하다’의 필로스(philos)와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라는 말의 합성어다. 그리하여 철학이란 ‘지혜 사랑’이다. 철학자 하면 소크라테스를 떠올리지만, 철학은 그가 만든 말은 아니다. 수록 순서와는 달리 실제 대화들과 플라톤의 집필도 『고르기아스』보다 『프로타고라스』가 앞선다. 전자가 당대 수사학의 대가와 그의 충성스런 제자들과 50대 중반의 소크라테스가 격돌한 정치 대 철학 논쟁이라면 후자는 당대 노회한 지성 프로타고라스와 30대 후반의 젊은 철학자가 벌인 도덕과 철학의 논쟁이다. 두 거장과의 세기적 논쟁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최초의 철학자로 탄생하고, 그의 죽음을 딛고 진정한 철학이 태어날 것임을 예고한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대화편을 발명했고, 그 사용법을 빛나는 저서들로 보여줌으로써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