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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사대부들의 편지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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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995732 811.96 -15-2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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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027527 811.96 -15-2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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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폐위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취음 권중면!
계룡산에서 받은 아름다운 초서(草書) 편지 104점과 시 7수를 통해
격변기에 살았던 조선시대 마지막 사대부들의 삶을 돌아본다!


이 책은 권중면(權重冕: 1856~1936)이 받은 서간(書簡) 세 첩을 번역한 것이다. 세 첩의 이름은 『양몽구독(粱夢舊牘)』, 『구독부여전(舊牘附餘全)』, 『구독습유건(舊牘拾遺乾)』이다. 모두 편지 104점과 시 7수가 실려 있다. 각 첩의 이름에 ‘구독(舊牘: 옛 편지)’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을 보면, 받은 편지를 모아 두었다가 세월이 흐른 후에 첩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첩들이 권중면이 만든 첩의 모두는 아니다. 『구독습유』에 ‘건(乾)’을 붙인 것을 보면, 원래 건(乾), 곤(坤) 두 첩으로 만들었는데 곤(坤) 첩은 없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첩 이름에 ‘부여(附餘: 남은 편지를 붙이다)’, 또는 ‘습유(拾遺: 빠진 것을 모으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첩들을 만들기 전에 훨씬 더 많은 첩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종이가 귀하던 시절이라, 신문지, 한지, 벽지, 장판지, 부대종이 등 갖가지 종이로 표구되어 있지만, 꼼꼼하고 정성스레 만들었다. 또 이 첩에는 권중면의 도장이 많이 찍혀 있는데, 그의 생활, 생각, 사상을 표현한 문구들을 담고 있다.
권중면은 1895년 출사하여 1900년 내부(內部) 판적국장(版籍局長), 1901년 평산 군수, 1903년 중추원 의관을 거친 후, 법부(法部) 검사국장(檢事局長), 한성재판소 판사, 비서원승(秘書院丞), 시종원(侍從院) 시종, 고등재판소 판사, 법원비서관 등을 역임하고, 1904년 12월 11일 정3품 진도 군수가 되었다. 1907년 1월 29일 능주(綾州) 군수가 되어 재직하던 중 7월 20일 고종황제 폐위사건이 났다. 아들 권태훈에 의하면, 당시 권중면 부부는 이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하였는데, 부인이 아들을 껴안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하므로〔君辱臣死〕 자결하려 했지만, 3대 독자인 너를 두고 차마 죽지 못했다. 너는 이것을 알아라.’고 했다 한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권중면은 서울에서 충북 영동읍 금리(錦里)로 낙향했다가, 이듬해 영동읍 남당리(南堂里)로 이사했다. 그리고 1916년 11월 계룡산 끝자락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로 깊숙이 들어갔다. 상신리에 은둔한 후 권중면은 시를 지으며 소일했는데, 동학사의 만우(萬愚) 스님과도 시로써 교제했다.
권중면이 살았던 시기에는 갑신정변, 갑오농민전쟁, 갑오경장, 을사보호조약, 고종의 폐위, 한일합방 등이 숨 가쁘게 연이어 일어났다. 그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 한 가운데 살았던 것이다. 고종이 폐위 당하자 그는 벼슬을 버렸고, 나라가 망하자 낙향했고, 이어서 계룡산 자락에 은둔하여 자연 속에서 시를 지으며 살았다. 격변기에 그가 살았던 삶도 조선시대 마지막 사대부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서평]

19세기 말~20세기 초는 역사적으로 큰 전환기였고, 그만큼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그 시대의 자료는 의외로 많지 않다. 오히려 18세기나 19세기 전반보다 남은 자료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 전통사회와 외세 침입의 접점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잘 모른다. 외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전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외세와 부딪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외세의 통치 하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 것들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모르는 것이다.
용케 남은 이 첩들이 그러한 갈증을 해소하는 데 딱 맞는 자료다. 백여 통 남짓한 이 편지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재판소, 세무서, 경찰서가 만들어져 지방 수령의 권한이 분산되고, 지방에 대토지를 소유하고 마름을 통하여 관리하는 중앙 고관의 이야기가 있고, 고을을 무대로 날뛰는 무법자가 있고, 빚을 독촉하거나 부채에 시달리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 더 부언할 점은, 백여 년 전 조선 사대부의 가식 없는 글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모두 조선의 마지막 사대부들이고 그들의 글씨가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중에서도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과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9)는 글씨로 이름이 있었던 인물들이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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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간찰첩의 내용

1) 『양몽구독(梁夢舊牘)』
편지 41통이 실려 있는데, 1901년~1912년에 주로 지방 수령일 때 받은 편지들이다. 발신인, 수신인, 연월일 등이 밝혀져 있어, 세 첩 중 편지의 양식이 가장 잘 갖추어진 첩이다. 첩의 이름 ‘양몽(粱夢)’은 당 나라 때 노생(盧生)과 도사(道士) 여옹(呂翁)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외세의 침략 속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한 세월이, 지나고 보니 한바탕 꿈처럼 아련했을까? 산골에 은둔하여 살며 지난날 벼슬살이 시절의 편지를 펼쳐놓고 간찰첩을 만들던 권중면의 마음을 짐작할 만하다.
이 첩에 편지가 7통 실려 있는 이병화(李秉和)는 권중면의 사돈이다. 그의 딸이 권태훈과 결혼했는데, 병약한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편지의 사연에서 역력히 묻어난다. 그 딸은 결국 요절했는데, 32번 편지는 탈상을 기다릴 것 없이 아들을 재혼시키라고 하며 사돈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 산본금태(山本金太)가 보낸 23번 편지가 이색적이다. 그는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목포에 있으면서 진도 군수 권중면의 도움을 받고 일본에 돌아가서 감사의 편지를 썼다.

2) 『구독부여전(舊牘附餘全)』
실린 편지가 38통이다. 날짜와 수신자를 쓰지 않는 편지가 많다. 1번 윤용구(尹用求: 1853~1939)[본관은 해평(海平). 구한말의 유명한 문신, 서화가. 예조, 이조판서 역임. 경술국치후 일제가 남작을 수여했으나 거절하고 은둔함]의 편지는 권중면의 아들 권태훈에게 보낸 것인데, 권태훈이 자기에 대하여 스스로 ‘시생(侍生)’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에 글을 주고받을 경우에는, 반드시 나를 ‘윤 판서 숙장(尹判書叔丈)’이라고 칭하고 자네는 스스로 ‘의질(義侄: 의조카)’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네. 우리 두 집안의 정의(情誼)가 여타 평범한 붕우(朋友)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네.”라고 했다. 2번 편지는 권중면이 평산 군수였을 때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악한 김명석(金明錫)의 악행을 낱낱이 말하고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3) 『구독습유건(舊牘拾遺乾)』
대부분 상신리로 들어가고 나서 받은 편지들로, 모두 25통이다. 상신리에서는 집에 서당을 열고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며 시를 지으며 소일했다. 편지에 동봉된 시가 6통인 것으로 보아, 시우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