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즐거움 세 가지 이로움을 주는 벗 국화의 아름다움 한여름 밤의 풍류 연꽃과 바람과 대나무와 이슬의 어우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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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억지로 하?라 부를 수 있으랴 임금 옆에도 겨와 손가락이 있다 색마色魔, 주마酒魔, 시마詩魔 내가 배고프면 남의 배고품을 생각하게 된다 친구의 견문이 바로 나의 견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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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옛글에서 발견한 현대적 감성과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기준은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같은 것인가 보다. 주옥같은 옛 선비들의 글에서 현대적 감성과 미적 감각을 엿본다.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개정판-POD)에서는 조선 지식인이 자연과 벗하며 즐겼던 풍류와 생활에서 발견한 소소한 깨달음을 아름다운 문장에 담았다. 박제가, 박지원, 정약용, 유몽인, 이덕무 등 조선 시대를 주름 잡은 선비들의 글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비오는 날 세검정에서 사납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즐기던 풍경, 국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 그림자마저 즐겼던 풍류를 들여다본다. 작고 여린 것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연과 벗하는 자연친화적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웰빙과 다르지 않다.
아름다움을 공유한다 홀로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며 교감하는 벗과의 사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정약용은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다.” 벗들과 함께 소풍을 떠나기도 하고, 한여름밤 친구들을 불러 연주를 하고 시를 짓기도 했다. 또한 권근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자 근심을 잠재운다는 뜻의 식파정을 짓기도 했다.
옛 사람들의 탁월한 안목과 식견 박지원은 감상에 대해 설명하고, 감상에 필요한 안목과 식견에 대해 깨달음을 주는 글을 남겼다. 또한 버려진 땅을 가꿔 꽃과 나무를 심고 연목과 정자를 세우기도 했다. 그 정자의 이름을 하풍죽로당이라고 지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훗날 이 연못과 정자에 거처하는 사람은 연꽃이 활짝 피어 그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볼 때 따사로운 바람처럼 은혜를 베풀고, 이른 아침 대나무가 물기를 머금어 젖어 있는 모습을 보면 촉촉한 이슬처럼 널리 인심을 베풀어라. 이것이 내가 이 정자의 이름을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이라고 지은 이유다.”
책속에서
[P.24~26] 스무 이튿날, 국옹 이군과 더불어 걸어서 담헌 홍대용의 집에 갔다. 밤에 풍무 김억이 왔다. 홍대용이 가야금을 타니, 김억이 거문고로 화답했다. 또한 국옹 이군은 맨 상투 차림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가자 떠다니는 구름이 사방에서 얽혀 후덥지근한 기운이 잠깐이나마 물러갔다. 그러자 거문고를 타는 소리가 더욱 맑게 들려왔다. 주변이 고요하고 모두 조용히 앉아 있어, 도사가 도를 닦고 승려가 참선하는 듯했다.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러움이 없다면 삼군(三軍)의 대군일지라도 가서 대적할 수 있다고 하더니, 국옹 이군은 한창 흥취에 젖어 노래를 할 때는 옷을 벗어젖히고 두 다리를 쭉 뻗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 매탕 이덕무가 언젠가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고, 때로는 재빨리 움직이는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보였습니다.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 주는 모습과도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눌러 연주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홍대용이 김억과 어울려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이덕무가 말한 왕거미의 거미줄 치는 모습을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 내가 홍대용의 집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담헌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인 연익성과 거문고 연주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 동쪽 하늘에서 구름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천둥번개가 한 번 내려치면 용이 바로 하늘로 올라 비를 퍼부을 듯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익성에게 “이 천둥소리는 궁상각치우 가운데 무슨 소리에 속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천둥소리에 맞춰 거문고 줄을 당겨 조율했다. 나 또한 ‘천뢰조(天雷操)’ 라는 거문고 곡의 가사를 지었다. -박지원, 『연암집』 ‘한여름 밤의 잔치에 관한 기’
친구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나보다 나를 더 아끼는 사람 보태고 보태어도 넘치지 않고 나누고 나누어도 모자라지 않는 관계입니다.
[P. 185~188] 대개 세상의 온갖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지만, 오직 나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내 전답을 짊어지고 도망갈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그래서 전답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따라서 집은 지킬 것이 없다. 내 정원에 심어진 꽃과 나무들을 뽑아갈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뿌리가 땅에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내 책을 훔쳐 없애 버릴 수 있는 자가 있는가? 책에 적힌 옛 사람의 말과 기록이 세상에 널리 퍼져서 물이나 불처럼 흔한데 누가 없앨 수 있겠는가? 내 의복과 양식을 도둑질해 나를 궁색하게 할 수 있는가? 세상의 실이 모두 나의 옷이고, 세상의 곡식이 모두 나의 양식이다. 내 옷과 양식을 훔쳐 가더라도 일부에 불과할 뿐이고 또한 세상의 모든 옷과 곡식을 없앨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세상의 온갖 사물은 모두 애써 지킬 까닭이 없다. 그러나 유독 ‘나吾’만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좋아해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가깝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않을 것 같다가도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으로 달아나는지 알 수조차 없다. 이익과 녹봉으로 유혹하면 가버리고, 위엄과 재앙으로 겁을 주어도 가버리고,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률만 들어도 가버리고, 까만 눈썹에 새하얀 치아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만 보아도 가버린다. 더욱이 한번 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나다. 어찌 실과 끈으로 묶고 빗장과 자물쇠로 채워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약용, 『여유당전서』 ‘수오재에 관한 기’
‘나’는 얼마나 허약한 존재입니까? 나의 의지는 반나절의 낮잠에 격침되고, 나의 검소는 한 점의 고기에 혼미해지고, 나의 겸손은 입에 발린 뻔한 말에 홀딱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