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무도회에서 약혼자를 다른 여인에게 빼앗긴 롤 베 스타인. 그녀는 이 사건으로 말을 상실한다. 그러다 단 한 번 우연히 만난 남자와 결혼해 고향을 떠나 산다. 감수성도 욕망도 잃어버린 그녀는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질서를 따르며 타인을 모방하는 일에 온 마음을 쏟는다. 그렇게 10년이 지나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어느 날 옛 친구, 타티아나 칼과 그녀의 정부(情夫) 자크 홀드를 목격한다. 타티아나는 무도회에서 약혼자를 ‘납치당하는’ 내내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친구다. 약혼자가 내팽개친 여자, 한 남자의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 결국 생명 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던 롤은 친구의 남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친구의 면전에서 자크 홀드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다른 여인에게 빼앗겨 관찰자, 엿보는 자의 자리로 밀려나 있던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누며 연인 곁의 자기 자리를 되찾는다. 이제 롤은 말을 되찾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마치 정신분석의 치료 과정을 보는 듯하다. 뒤라스는 말을 잃어버린 주인공, 해석이나 분석, 추론이 배제된 세계에 살고 있는 롤과 그녀가 살고 있는 침묵의 세계를 수식이 배제된 문체와 프랑스어가 허용하는 파격, ‘부서진 문장들’을 조합해 그려 준다. 1964년 이 작품을 발표할 즈음 뒤라스는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모데라토 칸타빌레≫와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 작가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하지만 ≪롤 베 스타인의 환희≫는 출판 당시 언론으로부터 즉각적인 찬사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후 라캉과 같은 정신분석가의 관심을 끌고 학계에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된 덕분에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현재는 뒤라스의 중요 작품으로 인용된다.
책속에서
[P.120-121] “그래 누구를 만났다고요?” 부인은 검정 드레스 속에서 가느다란 몸매에 어깨를 우그리고 있다. 그녀는 손을 들더니 나를 부른다. “오! 자크 홀드, 난 당신이 알아들었다고 믿었는데요.” 그녀는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코미디. “그래도 말해 보세요, 어서.” “뭘요?” “누구인지.” “당신, 자크 홀드 당신이에요. 나는 당신을 일주일 전 처음에는 혼자, 그다음 한 여자와 함께 갈 때 봤어요. 당신을 쫓아 부아 호텔까지 갔지요.” 나는 두려워졌다. 타티아나에게로 돌아가고 싶고, 집 밖으로 나가고 싶다. “왜요?” 그녀는 커튼에서 손을 놓고 몸을 곧추세워 내 앞에 온다. “당신을 선택했으니까요.” 그녀는 다가와서 바라본다. 우리는 아직 서로의 곁에 다가서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티 한 점 없이 하얗다. 그녀는 내 입에 입술을 갖다 댄다. 나는 응답하지 않는다. 너무 두려웠던 터라, 아직 할 수 없다. 그녀는 나의 이 불가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