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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일 수 없는 자

해설
작가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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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알라딘제공
사뮈엘 베케트의 장편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한국어로 처음 번역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베케트의 소설 3부작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중 마지막 소설이다. 세 소설은 그 내용이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되 동일한 이름들이 언급되고 주체를 규정짓는 이름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등에서 3부작으로 통하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이러한 흐름의 핵심을 담고 있다.
워크룸 프레스에서는 장편소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전승화 옮김)와 단편집 『죽은-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임수현 옮김)을 시작으로, 그동안 주로 희곡작가로 알려진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여러 편과 시집, 평론 등을 선집으로 구성해 펴낸다.
(별첨 참조)

자가-번역, 다시 쓰기

1906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사뮈엘 베케트는 스무 살 때부터 프랑스를 오가다 1937년 파리에 정착해 2개 국어로 글을 썼다. 초반에 영어로 쓰다가, 1945년부터 프랑스어로 쓰고, 후에 다시 영어로 썼다. 그러면서 영어로 먼저 쓴 글은 프랑스어로, 프랑스어로 먼저 쓴 글은 영어로, 대부분 스스로 번역했다. 이 책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또한 프랑스어로 쓴 후 영어로 직접 옮겼다.
파리의 미뉘 출판사에서 1951년 출간된 『몰로이』와 『말론 죽다』가 전통적 글쓰기를 벗어나 새로운 형식과 언어로 문학 자체를 지시하는 작품으로서 좋은 평을 얻고, 1952년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후, 1953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출간된다. 3부작의 정점에 서 있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베케트가 집필 이후 소진될 정도로 공들인 작품으로, 몇 년 후 그는 이를 영어로 번역했다. 그런데 베케트의 '자가-번역'에서는 원작과 번역 간 위계가 무너져 있다.

"번역과 원작 간에 위계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원작을 번역의 원인으로, 또 번역이라는 그림자의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케트의 작품 세계에서는 그 위계적 질서가 유지되지 못한다. 베케트의 화자들은 그의 작품들이 '원인'이 아니고 '연속되는 반복들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잘 빠져나올 거야, 이번은 지난번들처럼 되지 않을 테니까.'" -「해설」 중에서

그리하여 베케트의 글들은 같은 글임에도 제목부터 다르게 번역되어 있거나,
프랑스어 버전 속 문장이 영어 버전에서는 삭제되거나 반대의 의미로 번역되어 등장하기도 하고, 프랑스어와 영어가 혼용된 표현들이 출현한다. 저자 겸 번역자가 창작과 번역의 경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반복하되 오류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후 미세한 차이로 글에 균열을 내는 반복. 그 반복의 움직임으로 인해, 글이 움직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항상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거라고, 아주 달달 외우고 있는, 똑같은 푸념을, 그 이유는, 그동안에, 다른 것을 생각해보려고, 늘 똑같은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하는, 늘 똑같이 틀린 것을 항상 틀리게 말하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보려는 거야."(본문 134면)

그러므로 베케트의 '자가-번역'은 '다시 쓰기'이다.

계속되는 시작

제목대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3부작의 첫 소설 『몰로이』에서는 1부의 인물 몰로이와 2부의 인물 모랑은 자아분열로 인해 구별할 수 없는 존재들로 추정되고, 두 번째 소설 『말론 죽다』에서 말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죽어가고 있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팔다리도 없다. 몸통과 머리만 남은 채 단지에 들어가 어느 식당의 메뉴판 노릇을 하고 있는 이 "항아리-인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넘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이렇게 3부작은 주체를 규정짓는 이름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그 끝에서 "주체의 거의 완전한 추락"을 보여준다.
그러나 3부작의 구조는 실은 좀 더 복잡하다. 어머니의 집을 찾아가는 『몰로이』가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인 잉태로 향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말론 죽다』가 부조리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워 있는 것이라면, 죽음 이후,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시작하지 않는 걸 거야. 하지만 나는 반드시 시작해야만 하거든.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계속해야만 한다고."(본문 10면) 끝에서, 다시, 시작되고, 계속된다. 즉 순환한다. 그리고 경계를 무색케 하는 이러한 순환은 작품을 넘어 계속된다.

"분열, 반복, 순환, 움직임, 모호해진 경계, 이 요소들로 인해 작가는 작품의 소유자 또는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작품의 일부분이 되고, 독자 혹은 관객은 작품의 소비자이면서 또 동시에 작품의 일부분이 되는 부조리하고도 괴기스러운 상황이 연출된다. 베케트는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부조리한 인간의 실존일 테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작품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삶을 설명하지 않는 대신 작품을 부조리한 삶 그 자체로 만들었기에 작가도, 또 독자도, 창작의 일부분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해설」 중에서

또한 베케트는 이 작품에서 새로운 형식들을 시도했다. 낯설게 하기. 본문 초반을 벗어나면서 단락 구분 없이 글이 하나로 이어지고, 과용된 쉼표는 문장성분들 간의 관계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혼란을 안기고, 마침표는 문장이 이어지는 중간에 사용된 듯한 인상을 준다. 문단 및 문장부호의 기본적인 용도를 무색하게 하는 이러한 시도들은 결국 모두 '계속'을 향한 의지로 읽힌다. 다시,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계속해야만 한다고."

"베케트의 글쓰기를 설명하는 개념 중 '자아의 무한한 분열'이 있다. 이는 '나'라는 존재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또 정체를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미분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 분열은 인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즉 언어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텍스트는 출판 전 텍스트, 출판된 텍스트, 다른 언어로 다시 쓴 텍스트로, 이야기를 하거나 이야기를 듣는 존재는 텍스트 내의 화자, 텍스트 밖의 작가, 독자, 번역가, 비평가 등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분열은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은 하나의 가치가 군림할 수 없도록 작용하며, 무한히 전개될 수 있는 실존적 흐름을 형성한다." -「해설」 중에서

순환하며 이루어지는 베케트의 세계. 그 중심에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있다.

표지 사진
EH(김경태) - 사진가, 그래픽 디자이너. 중앙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스위스 로잔 예술 대학교(ECAL) 대학원에서 아트 디렉션을 전공했다. 「스트레이트-한국의 사진가 19명」,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등 여러 전시에 참여했으며, 작품집으로 『온 더 록스』와 『로잔 대성당 1505~2022』가 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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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 지금은 어딜까? 지금은 언제일까? 지금은 누구일까? 나한테 묻지 말고. 나는이라고 말하기. 생각하지 말고. 그것들을(?a) 질문이라고, 가설이라고 부르기. 앞으로 가, 여기서 저것은 앞으로라고 하고, 이것은 가라고 하기.
[P. 15] 내 귀가 완전히 먼 건 아닌 게 나한테 전달되는 소리들이 분명히 있거든. 여기가 거의 완벽하게 조용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그게 또 완전히 조용한 건 아니라서. 나는 이곳에서 들은 첫 번째 소리를 기억하고 있어, 처음 들은 날 이후에도 같은 소리를 자주 듣고는 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여기 체류하게 된 데에도 어떤 시작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봐야만 할 거야, 그게 비록 이야기를 편하게 하려는 수작밖에 안 될지라도. 지옥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루시퍼의 반란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따라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유사성에 기대어, 영원부터는 아니었을지라도, 영원토록 내가 여기에 있으리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자 이런 생각이 내 설명에 얼마나 특별한 공헌을 하는지 바로 보자고. 특히 기억이, 내가 사용하는 걸 금해야만 한다고 내가 생각하고는 했던 그 기억이, 필요한 경우에는, 즉시 발언권을 가지게 될 거야. 여기에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들이 적어도 1천 개 정도는 있어. 이 단어들이 나한테 필요할 때가 아마 있을 거야. 그러니까 완전무결한 침묵의 한 시대가 지나가면, 어떤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
[P. 62] 섬, 나는 섬 안에 있어, 나는 절대로 그 섬을 떠난 적이 없었어, 그걸 보면 나도 참 한심해. 나는 나선 모양으로, 세계 일주를 하며 살았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믿고 있었지. 착각한 거야, 내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 곳은 바로 그 섬이니까. 나는 오로지 그 섬 말고는, 다른 곳은 전혀 몰라. 사실 둘러볼 기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섬에 대해서도 역시나 아는 게 없어. 나는 섬 기슭에 다다르면, 거기서 방향을 틀지, 섬 안쪽으로. 내 경로는, 나선 모양이 아니야, 그것 역시도 내 착각이었던 거야, 그보다는 불규칙한 고리들이 겹쳐 있는 모양이지, 그때그때 밀려오는 공황 정도에 따라, 때로는 왈츠처럼, 짧고 급격한 회전으로 만들어진 고리들, 때로는 이탄지(泥炭地) 전역을 감싸는, 큰 폭의 포물선을 그리는 고리들, 그리고 때로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꾸준하게 축을 따라 이어지는 고리들. 하지만 내가 언급하고 있는 그 시기에 방금 말한 역동적인 삶은 끝이 나기 때문에, 제3자가 주는 자극 없이는, 나는 움직이지 않아, 또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고. 사실은, 예전에 대단한 여행가로 활동하다가 그 끝 무렵에, 무릎으로 걷다가, 기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다 보니, 알다시피 그 위에 머리만 달랑 얹혀 있는, 그저 (비참한 상태의) 몸통만 남은 거야, 자 이게 내가 최대한 이해하고 기억했던 내 남은 신체에 관한 묘사야. 도살장 근처 인적 드문 길가에 놓인, 속 깊은 한 항아리 속에, 꽃다발을 쑥 집어넣듯이, 항아리 주둥이가 내 입에 닿을 정도로, 쑥 들어가 있는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어, 마침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