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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한국고전선집을 펴내며

목차

김종직은 누구인가 16

제1장 구름 구경, 대나무 구경 29

진주 사람 권양구의 청풍정 시에 화답하다 33

매포루에 올라 쌍매당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 35

동쪽 성의 참새들 37

금강산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다 39

한밤중에 양산의 징심헌에 앉아서 본 것을 기록하다 43

서읍령 46

여흥에 정박하다 49

새끼 원숭이 51

초봄에 대궐에서 53

고열암에서 자다 55

추석날 천왕봉에서 달을 보지 못하다 57

산을 내려와서 읊다 59

쾌청한 날 제운루에서 61

여주의 청심루에 오르다 63

밤에 보은사 아래에 배를 대 놓고 시를 써서 주지 지우 선사에게 드리다 66

창랑정 69

충주의 공신루를 읊은 시에 차운하다 72

한식날 어느 시골집에서 75

8월 1일 아침에 일찍 영암을 출발하여 월출산을 지나다 78

추석날 능성현의 봉서루에 오르다 80

복룡 가는 도중에 83

여름날 산수풍경을 그린 병풍 두 폭에 시를 적다 85

관어대부 88

두류산을 유람한 기행록 94

제2장 찾아오는 발소리 반가웠지 99

김선원이 찾아오다 103

허사악이 홍겸선에게 주려던 벼루를 빼앗고는 시를 지어 사과하다 106

불국사에서 김세번과 함께 이야기하다 109

손봉산이 부쳐 준 연아체 시에 다시 화답하다 111

나월헌의 옥명 스님에게 주다 115

일본산 벼루를 유극기에게 주었는데, 그가 사례한 시에 차운하다 119

고령부원군 신숙주 어르신의 시를 받들어 화답하다 121

김굉필과 곽승화 두 수재에게 답하다 124

밀양 부사 임수창의 시집에 있는 사가재의 시에 화운하다 128

진산군께서 서울에서 부친 시에 차운하다 132

과거를 보러 떠나는 제자들에게 시를 써서 전송해 주다 134

김선원에 대한 만사 137

광한루에서 김계운과 조태허에게 화답하다 141

추강에게 부쳐 주다 144

김 승지에게 답하다 147

형재 선생의 시집에 대한 서문 150

윤상 선생의 시집에 대한 서문 156

제3장 산 사람은 이제 누구를 의지할꼬 163

수군이 금산으로 가다 167

목아를 애도하다 170

보천탄 가에서 어머니를 맞이하다 172

생원 권처지의 시에 차운하다 175

과거에 급제한 생질 강백진에게 시를 지어 주다 178

손자 희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 182

10월 11일에 아들 곤이 세상을 떠나, 15일에 일현에 임시로 매장하다 185

7월 22일에 아들이 태어난 기쁨을 기록하다 190

중용 형을 전송하다 193

죽은 아내 숙인 조씨에 대한 제문 196

조카 치에게 답하는 편지 202

『이준록』 - 선공의 사업 208

『이준록』 - 제후(題後) 212

제4장 옛일 슬퍼하며 홀로 길게 읊조리네 217

탁라가 14수 221

예안을 지나다가 우탁을 회고하다 227

「동도악부」 회소곡 229

「동도악부」 우식곡 233

「동도악부」 치술령 236

「동도악부」 달도가 239

「동도악부」 양산가 243

「동도악부」 방아 타령 247

「동도악부」 황창랑 251

포석정 255

계림의 옛일을 생각하다 258

황산 261

승려 윤료가 선산지리도를 만들었으므로, 그 위에 절구를 쓰다 264

태인의 연못가에서 최치원을 생각하다 270

탄현에서 성충을 회고하다 272

송도록에 대한 발문 275

제5장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 있으랴 283

동래현의 온천 287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가 중단하다 290

가흥참 293

아산현에 묵다 296

낙동강 노래 299

길가의 소나무 껍질이 다 벗겨지다 303

비가 오지 않아 걱정하다 306

범어역의 길가에서 본 것을 기록하다 308

장맛비를 걱정하다 310

비가 오자 기뻐하다 312

차밭 315

함양성 초소의 지붕 공사 318

성모묘에 기우제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리다 320

성 쌓는 공사 322

우물이 말라 버리다 325

쌀을 건져 내는 것을 탄식하다 327

영천의 소루에 대한 기문 330

제6장 점필재,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335

1.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린 졸기(卒記) 337

2.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평가 342

3.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평가 349

4. 『점필재집』 후서 353

5. 신도비명 359

6. 신도비명 후지 370

7. 점필재 선생 묘갈문 373

연보 379

참고문헌 390

판권기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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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 학문의 밭에서 문장을 꽃피우다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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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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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후반에서 16세기 초반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정치 판도는 보통 훈구파 대 사림파의 대결 구도로 정리된다. 계유정난 공신들을 주축으로 한 훈구파 관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단하자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사림파 관료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격렬한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몇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사림파 지식인들, 이들은 이후 조선의 학술과 정치를 새롭게 개편했다. 이 사림파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첫머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점필재 김종직이다. 그는 숙부인 서초패왕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제자인 김일손이 이를 사초(史草)에 실었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지목을 받아 부관참시(剖棺斬屍)되는 화를 입는다.

김종직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김종직은 정몽주로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도학자이자, 김굉필, 정여창 등 사림파의 핵심 인물을 키워내 조선 성리학 발전과 정치 개혁의 초석을 놓은 사림파의 영수, 큰 스승으로 평가받았다. 시인·작가로서의 출중한 능력과 중앙·지방을 막론하고 관료로서 쌓은 실적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문보다는 문장에 주로 힘썼다거나 조정에서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조의제문」을 지은 것을 두고도 한편으로는 그의 강직한 절의를 보여 주었다는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벼슬을 내린 임금을 에둘러 비난한 불충(不忠)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상반된 평가들을 한 번에 받는 김종직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일까? 김종직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복잡한 이해관계나 관점의 차이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되기도 하며,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굴곡을 겪기도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만 가지고 한 인물의 실제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김종직의 삶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직접 지은 작품들을 모은 문집 『점필재집』 속에 가장 풍성하고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점필재집』을 읽음으로써 역사 기록이나 다른 사람의 평가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김종직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좀 더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또 그가 헤쳐 나가야 했던 시대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사회상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이 선집은 시문의 성격에 따라 ‘자연’, ‘교유’, ‘가족’, ‘역사’, ‘애민’이라는 총 5개의 테마를 설정하여 각각의 테마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정선(精選)하여 번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6장 ‘점필재,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졸기(卒記), 퇴계 이황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평가, 그의 신도비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1장 ‘구름 구경, 대나무 구경’은 자연 테마에 속한 작품들을 엮은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을 읊은 시문들로, 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지은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저자의 두류산 기행록과 이와 관련된 기행시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2장 ‘찾아오는 발소리 반가웠지’는 교유 테마에 속한 작품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와 긴밀한 교유를 나누었던 선후배 문인, 친구, 제자와 주고받은 시가 주를 이룬다.
3장 ‘산 사람은 이제 누구를 의지할꼬’는 가족 테마에 속한 작품들을 엮은 것이다. 저자의 부모, 아내, 자식, 조카 등에 대한 시문들로,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격의 글들이 많다.
4장 ‘옛일 슬퍼하며 홀로 길게 읊조리네’는 역사 테마에 속한 작품을 엮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 및 인물 등에 대해 읊은 영사시(詠史詩)와 그의 대표 저작이자 우리나라 악부체 문학의 효시인 「동도악부」 7편, 그리고 발문 1편이 수록되어 있다.
5장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 있으랴’는 애민 테마에 속한 작품을 엮은 것이다. 저자의 애민 의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로, 자연 재해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애환을 그린 시들과 애민 사상과 관련이 있는 기문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서두에는 해제를 실어 김종직의 삶을 요약하여 서술하고 『점필재집』의 간행 경위를 소개하였다. 말미에는 김종직의 연보를 첨부하여 김종직의 삶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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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구름 구경, 대나무 구경

지팡이 짚고서 겨우 산에서 내려오니 杖藜纔
下山
맑은 연못이 불현듯 나그네를 비추네 澄潭忽蘸

굽이진 물가에서 내 갓끈을 씻으니 彎碕
濯我纓
빠르게 부는 바람이 겨드랑이 지나는구나 瀏瀏風生腋
평생토록 산수 구경에 욕심냈는데 平生饕
山水
오늘은 나막신 한 켤레 다 닳았네 今日了緉


마음 맞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노니 顧語會心人
어찌하여 세상일에 얽매여 사는가 胡爲赴形役

☞ 물에 갓끈을 씻은 행위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창강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는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저자가 현재 세속의 더러운 것들을 멀리한 채 맑고 깨끗한 자연 속을 유람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 「산을 내려와서 읊다」 중에서

유호인(兪好仁), 해공(解空) 스님과 함께 북루(北壘)에 오르니, 조위는 벌써 옥상에 올라가 있었다. 제아무리 높이 나는 기러기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 있을 수는 없었다. 이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 없고 그저 까마득하고 아득하기만 하여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였다.
“먼 곳을 구경하는 요령을 알지 못한다면 한갓 나무꾼들의 산 구경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러니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부터 시작해 먼 데까지 바라보는 것이 좋을 듯하네.”

☞ 결국 17일 새벽에 저자는 일행과 함께 재차 천왕봉에 올라 본문에 나온 대로 멋진 경치를 만끽하였다. 남도(南道)에서 가장 높은 두류산 꼭대기에 오르니 동서남북 사방의 산들이 다 보였는데, 해공 스님이 알려 주어 본문에 기록된 산만 무려 28곳이나 될 정도였다.……
- 「두류산을 유람한 기행록」 중에서
제 2 장 찾아오는 발소리 반가웠지

복사꽃 오얏꽃 핀 사립문에서 柴門桃李下
손을 맞잡고 함께 활짝 웃었네 握手共開顔
경치만 구경해도 절로 웃음이 나오니 物色能供笑
풍류를 즐기는 데 부족함이 없어라 風流未覺慳

등불 심지 돋우며 이야기 다 나누어도 挑燈談欲罄

이별이 아쉬워 서로 마음 쓰이네 恨別意相關
내일엔 저 감천 언덕에서 노닐다가 明日甘川岸
차마 버들가지를 부여잡을 수 있을까 垂楊可忍攀

☞ 무오사화로 저자의 주변인들에게 큰 화가 미칠 때 이를 빌미로 김맹성의 후손들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지지당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우연히도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김맹성 첩의 꿈에 누군가가 나타나 빨리 저자의 시가 적힌 현판들을 치우라고 알려 주어 미리 숨겨둔 덕분에 저자와 교분이 있던 여러 집안이 화를 당할 때도 김맹성의 후손들만은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 「김선원이 찾아오다」 중에서

처지가 곤궁해진 다음에 문장이 더 훌륭해진 경우는 실제로 있었지만, 벼슬이 높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 중에 문장을 잘 지었던 이가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는가. 타고난 도량이 넓고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 재상의 지위를 마치 본래 지니고 있던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말을 꺼내면 조화로운 악기처럼 운율(韻律)이 저절로 들어맞고, 생각이 떠오르면 바람과 구름처럼 문장도 저절로 따라온다. 그래서 마음속에 충만한 인의(仁義)가 자연히 시(詩)로 나타나서 가리려야 가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런 사람들이 소인배이면서 부귀를 누리는 자들처럼 자기 뜻을 성취했다고 스스로 만족해 하겠는가.

☞ 그동안은 중국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말한, “시는 처지가 곤궁해진 뒤에야 훌륭해진다.”라는 말을 불변의 지론(至論)으로 여겨 왔는데, 저자는 꼭 곤궁한 처지에 있지 않더라도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면 충분히 훌륭한 시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 「형재 선생의 시집에 대한 서문」 중에서
제 3 장 산 사람은 이제 누구를 의지할꼬

늙은 할미가 사향과 주사 섞어 약 지어 놓고 調麝硏砂有老姑
마중을 나갔는데 사랑하는 손주를 못 보다니 迎門不見掌中珠
하늘이 내린 운수는 참으로 알기가 어렵네 天公薄厚眞難曉
봄에 깐 병아리도 여덟아홉 마리는 되거늘 春卵雞

八九雛

☞ 며느리가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두어 달 몸조리를 한 뒤 시댁인 밀양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저자와 부인 조씨는 첫 손주를 볼 생각에 오매불망 기다렸을 것이다. 1구에 나오는 ‘사향(麝香)’과 ‘주사(朱砂)’는 아이가 열이 날 때 쓰는 약재인 우황포룡환(牛黃抱龍丸)의 주요 재료이다. 행여 손자가 열병이라도 걸리면 쓰려고 귀한 약을 미리 준비해 둘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문밖에서 맞이한 며느리 품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가 없었다. 그 대신 생후 3개월도 안 된 갓난아이가 이달 초에 세상을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 「손자 희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 중에서

내가 예전에 너희 여러 사촌 형제들의 이름을 지을 적에 모두 ‘실 사(絲)’ 변을 붙이게 한 것은 바로 우리 가업을 계속 이어서 영원토록 융성하게 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수(綬), 굉(紘)은 둘째 형님이 스스로 가르치고 있어 반드시 앞으로 성취가 있을 테지만, 나에게는 겨우 하나 있는 아들이 지금은 몹쓸 병에 걸려서 더는 가르칠 가망이 없다. 그리고 너희 형제 둘은 이미 우뚝하게 두각을 보이지만, 학문이 넓고 심오한 데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실정이다. 보통의 선비 신세는 막 면했어도 아직 훌륭한 선비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만일 배운 것들을 끊임없이 복습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세월만 흘러가 버릴 것이니 앞으로 어찌 하겠느냐?

☞ 1479년(성종 10) 12월에 저자의 어머니가 별세하자, 저자는 이듬해인 1480년 3월에 고향 밀양의 고암산(高巖山) 분저곡(粉底谷)에 있는 선공(先公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 옆자리에 어머니를 모시고는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렀다. 이때 저자는 큰조카인 김치가 와서 함께 삼년상을 치르기를 바랐다. 큰형 김종석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기에 예법(禮法)상 고인의 큰 손자인 김치가 엄연한 상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치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당장 거상하기 힘들다는 뜻을 내비치자, 저자는 이를 엄하게 꾸짖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훈계하려는 의도로 길게 답장을 써서 보낸 것이다.……
- 「조카 치에게 답하는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