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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일민이 걸은 길

제1부 어린 시절
내 고향 청하
제2의 고향 부산

제2부 4·19혁명
고려대학교
4·18 고대의거
민주혁명의 깃발

제3부 직장인 시절
5·16 군사쿠데타
회사원 생활

제4부 청년정치인
정계입문
3선개헌 저지투쟁
야당의 세대교체
유신시대의 야당

제5부 5·30 전당대회
야당다운 야당
유신체제의 종말
서울의 봄

제6부 양김시대의 독자노선
정통야당의 재건
직선제 개헌 투쟁
6월항쟁과 양김 분열
5공비리조사특별위원회

제7부 새로운 정치실험
3당 통합
민주당 창당
야권통합

제8부 영욕의 세월
제1야당 총재 시절
서로 만날 수 없는 길
말년에 닥친 정치적 시련

회고록을 마치며

이기택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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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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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소신을 지켜온 어느 정치인의 소회
10년 넘게 이어온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의 도화선은 3.15 부정선거였다. 이에 분개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4.18 고대시위를 일으켰고 이기택 총재는 당시 학생위원장으로서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잠시 직장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967년 제7대 국회에 최연소 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이래 8, 9, 10, 12, 13, 14대 국회의원으로 연이어 당선되었다. 1976년 신민당 최연소 사무총장, 1979년 신민당 최연소 부총재를 역임하며 한국야당사 유례없는 행보로 양김시대를 잇는 차세대 주자로 국민적 관심을 받아왔다.
그런 그였지만 1990년 3당 야합 당시 YS를 따라갈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싸워온 군부독재 세력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김정길, 김광일, 노무현, 장석화 의원 등과 함께 3당 통합을 거부함으로써 부당한 정치 현실에 맞서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창당한 ‘꼬마 민주당’의 총재로 선출되기도 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자연스레 정계를 은퇴했다. 겸허히 정치적 생명이 끝났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잠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정계은퇴 후에는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사업에 전념했다. 그렇게 30여 년 동안 한국 정치사에서 주역으로 활동해온 그에게 정계은퇴 후 간혹 기자들이 묻곤 했다. YS와 DJ를 넘어서지 못한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 모로 내가 그분들보다 못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이 지키지 못한 원칙을 지켰고, 때론 그분들이 외면했던 정도(正道)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긴 세월 정치를 해오면서 어찌 아쉽고 아픈 대목이 없으랴만, 그래도 나는 후회가 없다. 소처럼 묵묵히 내 길을 걸어왔을 뿐이다.”(본문 374쪽)

권위와 맞서 싸우고 합리적인 정치 문화를 소망하다

70~80년 야당을 이끌어오던 거두 YS와의 결별은 그에게 더 큰 시련을 주었다. 3당야합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216석을 가진 거대 여당이 되었고, 거기에 합류하지 않은 이기택은 다시 야당의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 게다가 새로 창당한 민주당은 전체 의원이 8명 밖에 되지 않는 미니 정당이자 원외 정당이었다. 게다가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를 거부하는 소장파 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정당이다 보니 총재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당의 운영자금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아 전적으로 이기택 총재의 몫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정당문화는 여야를 막론하고 권위주의적인 군사정권의 영향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특히 민주화를 주장하는 야당까지도 양김이라는 보스를 축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정치형태에 회의를 품고 있었던 이기택은 진정한 민주정당의 운영방식을 민주당에 도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일지도체제의 정당이었지만, 가장 자유스러운 논의과정을 거쳐 의사를 결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정당 민주화가 일반화된 데에는 내가 총재로 있으면서 개척해온 민주당의 새로운 정치문화가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결코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자부한다.”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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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3] “나는 4·19혁명의 주역이란 이름으로 때론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다. 물론 이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며 내 삶의 동력으로 삼아왔지만, 한편으로 무거운 짐이자 빚이었다. 평생 그 빚을 갚는다고 애썼지만 과연 얼마나 갚았는지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P. 263]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나의 단식투쟁이 6월항쟁이나 6·29 선언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리라곤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든다. 죽음의 문턱에 다가설 만큼 간절한 염원들이 모이고 모여 하늘을 움직였으리라고. 세상의 발전과 변화는 결국 이렇듯 간절한 염원들로 인해 이뤄지는 게 아닐까 하고. ”
[P. 307] “참으로 나날이 잠 못 이루는 고독한 시간들을 보낸 뒤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3당 통합을 거부하고 내가 앞장서 미력한 세력이나마 규합해 부당한 정치현실에 맞서기로 했다. 이러한 나의 결심은 최악의 경우 정치를 그만두겠다는 비장한 배수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