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충북 영동 동학농민혁명유적지 참고문헌(p. 293-297)과 색인 수록 영동군의 지원으로 출간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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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충청도 동남부의 동학농민혁명과 영동의 위치 _ 이이화 충청북도 동학농민혁명사의 전개과정 _ 채길순 해월 최시형의 동학재건과 영동지역의 포덕 _ 임형진 북접농민군의 전투방식과 영동 용산전투 _ 신영우 일제강점기 충북 영동 지역의 민족운동 _ 박걸순 영동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문지리학적 고찰 _ 조극훈 영동 지역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역사적 의미 _ 채길순 문학작품에 나타난 영동 동학농민군 활동 양상 연구 _ 김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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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영동 동학농민혁명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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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471928
951.545 -18-6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2471929
951.545 -18-6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출판사 책소개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ation) :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충청도 영동
경기도와 강원도,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대규모 집결지였던 영동 일대는 우리나라가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변혁 운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던 지역입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커다란 사건 중 하나인 공주 우금치전투는, 영동과 황간에서 통령 손병희의 지휘 하에 출진한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삼례 집결지에서 전봉준 장군의 지휘 하에 집결한 뒤 북상한 동학농민군과 논산에서 합류해서 전개된 것입니다. 영동과 황간은 동학의 주요 근거지로서 교세가 크게 증대된 지역인데다가, 충청 경상 전라 3도를 접경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동학이 탄압을 받았던 시기에도 기찰포교(譏察捕校)의 추적을 피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고, 또 보은의 동학 대도소와 청산의 해월 최시형 거주지에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동학농민군이 집결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지역이었습니다.
책속에서
충청도 내륙 지역은 최시형이 1870년대와 80년대부터 정부의 탄압을 피해 잠행(潛行)하면서 동학을 전파한 곳이다. 최시형은 1880(庚辰)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인제 갑둔리에서 간행하고, 이어 다음해(1881, 辛巳)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단양 천동에서 간행하고 난 뒤, 충청도 내륙과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활발하게 포덕 활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 손천민, 손병희, 김연국 등이 입도해 활력을 불어 넣었으며 연달아 호남과 경기도로 지역을 넓혀 포덕하였다. <충청도 동남부의 동학농민혁명과 영동의 위치 중에서>
청도 지역에 주목하는 이유는 해월 시기 동학의 주세력권이 충청도 지역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해월의 36년간의 포덕 활동 기간 중 가장 오래 머무른 지역도 충청도였고, 그가 가장 공을 들인 지역도 당연히 충청도였다. 충청도 지역의 포덕은 초기 강원도 산악지대에서 은신하며 전하는 포덕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즉 동학 포덕이 강원도를 떠나 충청도로 진출하였다는 것은 산간지대가 아닌 평야지대로의 확대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은 경기도와 전라도라는 조선의 중심지와 보다 넓은 지역으로의 확산을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충청도 지역에서의 동학 전파는 최시형에게 동학의 향후 발전과 미래상의 청사진과도 같았다. <해월 최시형의 동학재건과 영동지역의 포덕 중에서>
우금치전투는 처절한 전투였다. 수많은 시체를 보면서 우금치를 향해 오르고 또 오르며 공격했다. 일본군이 무려 40에서 50차례까지 일제 사격을 해야 할 만큼 고지를 향해 올라갔다. 물러났다가 오르기를 반복하다가 조금 먼 곳의 언덕에서 총탄을 피하였다. 그러자 관군이 다가와서 조준사격을 해서 쓰러뜨렸다. 그것이 11월 8일의 전투였다. <북접농민군의 전투방식과 영동 용산전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