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홀러웨이, 『크랙 캐피털리즘』 안에서-대항하며-넘어서기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 예측불가능한 발 빠른 춤이 내는 균열이 우리의 유일한 무기이다 | 불가능성의 가장자리 | 틈새 혁명의 멜로디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무한도전’은 끝났다 유동하는 공포, 포비아포비아(phobiaphobia) | 액체근대의 위기, 캐러밴 공동체와 짐 보관소 공동체 | ‘다른’ 인간성의 탄생, 쓰레기에 대한 무책임과 무관심 | 무한도전은 끝났다
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내 삶의 주인 되기, 자기수련으로서의 공부 아파야 산다 ?건강과 질병의 이분법 해체 | 통즉불통(通則不痛 혹은 痛則不通) ? 위생이 아닌 양생 | 자기 몸의 연구자
3부 각자도생에서 함께 사는 삶으로 ― 철학에서 비전 인트로 1. 파지사유 5년, 공간과 함께 우리도 변해 가고 있다 | 2. 공부에 대한 ‘말랑말랑한’ 상상력, 파지사유 인문학과 ○○○카페들 | 3. 우리들의 ‘미스바카페’ | 4. 크로스를 위하여, 밀양X문탁 | 5. 파지사유의 밤, 인문학은 사건이 될 수 있을까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변신과 차이가 번성하는 공유지 공유지를 질문하다 | 공통체, 그게 뭐지? | 공통적인 것은 공적인 것도 사적인 것도 아니다 | 대안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삶정치적 사건 | 늘 새롭게 구성되는 다중 되기 | 특이성들이 번성하는 공유지 만들기
B. 스피노자, 『에티카』 뱀파이어의 ‘윤리학’ 공부 황혼에서 새벽까지 | 전복적 스피노자, 인간 중심주의와 목적론 비판 | 고요한 폭풍, 이성과 함께 감정을 224 | 정동 vs 정동, 세계에 참여하는 ‘날것’의 느낌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생산된 진실만이 있을 뿐 팩트 체크에 대한 팩트 체크 | 파괴자 미셸 푸코 | 진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 | 전 사회적 장치 | 무너지는 진실, 생산되는 진실
루쉰, 『무덤』 기꺼이 몰락하기 위한 싸움 지금, 여기서 루쉰을 읽다 | 내가 서 있는 곳이 폐허다 | 나 또한 식인을 했다 | 몰락을 위한 싸움 | 끝내 사라져야 할 글을 쓰고 또 쓴다
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필연과 자율의 삶, ‘건강’ 의료화가 잉태한 병들 | 삶의 필연: 통증, 질병 그리고 죽음 | 건강에 대한 진정한 정의
이와사부로 코소, 『뉴욕열전』 ‘뉴욕’은 어디에나 있다 도시 남자 혹은 무명 건축가 | 깊이 있는 풍경 | 민중과 치마타, 저항의 시공간 | 중앙공원은 누구의 것인가, 장소와 힘 | 공존 불가능한 것에 대한 탐구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폐허에서 피어나는 자율적 개인의 도덕성 우리는 누구인가? | 폐허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공간 | 재난 유토피아 vs 재난 자본주의 복합체 | 희망의 씨앗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질기도록 굴복하지 않는 목소리들 ‘자기 말’을 갖지 못한 사람들 | ‘말’을 시작하며, 나를 넘어서다 |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들의 말’
4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 교육학을 넘어 마을교육으로 인트로 1. 우리들의 소의경전, 이반 일리치와 간디 | 2. 새로운 주체의 탄생 ? 마을교사 | 3. 파지스쿨 ?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학교 | 4. 마을의 색깔이 바뀌고 있다
이반 일리치, 『학교 없는 사회』 ‘학교화 되지 않는 사회’ 만들기 학교를 없애자고? | 학교화가 뭐지? | 사람들이 가졌던 질문들 | 디스쿨링 문탁네트워크
간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간디의 꿈 간디의 재발견 | 자기통치로서의 스와라지 | 마을 스와라지의 정치학 | 다시 간디에게로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가르칠 자격’에 대하여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 | 최고의 스승이 바보를 만든다 | 지성의 평등은 무지한 스승을 가능토록 한다 | 홀로 책을 읽는 것과 함께 책을 읽는 것의 차이 | 알렉산드로스의 검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앎의 나무』 안다는 것에 대한 착각?앎, 존재, 행위는 나눠지 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 생명의 또 다른 이름, 오토포이에시스 | 구조접속, 생명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생물학에서 윤리학으로 |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혁명으로서의 책 읽기 사사키 아타루를 만나다 | 책 읽기는 위험하다 | 읽는다는 것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어라! | 읽어 버리면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시오노 요네마쓰, 『나무에게 배운다』 아주 찬찬히 전해지는 것들 내게 전해진 말들 | “마음을 기른다” | “몸에 새긴다” | 존재의 실타래 속에서
이계삼, 『청춘의 커리큘럼』 시대의 끝자락에서 청춘에게 말을 걸다 대체 왜, ‘커리큘럼’인가? | 우리는 모두 끝에 다다랐다 | 말을 거는 교육 | 마주하라, 더욱더 강렬한 목소리로
1.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는 ‘마을’이나 ‘인문학’, ‘공동체’ 등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곳이지만, 아직 문탁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 책을 먼저 접하는 독자들도 많을 듯합니다. 문탁을 처음 만나는 독자분들을 위해 간단히 문탁을 소개해 주세요. 문탁은 공부하는 곳인가요? 마을인가요? 어떤 분들이 모여 계신가요? 아무나 가서 공부할 수 있나요? 문탁네트워크는 공부를 통해 삶의 비전을 찾아가는 인문학 공동체입니다. 가정집 아파트 거실에서 이반 일리치(Ivan Illich)를 읽는 작은 공부 모임으로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공부하며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거실에서 나와 터전을 마련하여 공부하고 활동해 온 지 이제 햇수로 1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문탁네트워크의 공부의 영역도 활동의 영역도 계속해서 새롭게 구성되어 왔습니다. 세미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공부의 내공을 다지는 것이 언제나 기본이지만, 문탁네트워크의 색깔과 방향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떤 공부를 하느냐, 어떤 활동이 만들어지느냐, 어떤 사람들이 접속하느냐에 따라 변신을 거듭해 온 것이지요. 지난 10년간 일관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부와 마을이라는 화두입니다. 지식 축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삶의 비전을 찾기 위한 공부, 공부로 만난 친구와 함께 다른 삶을 만들어 가는 실험적인 공동체로서의 마을, 우리에게 공부와 마을은 어느새 공통의 감각이자 공통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10대 청소년부터 청년, 주부, 직장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오갑니다만, 문탁네트워크의 세미나에서 우리는 나이, 성별, 직업 등에 관계없이 함께 공부하는 학인이 되고, 여러 활동을 통해 공유지를 함께 만드는 친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문탁네트워크는 공부를 통해 친구를 만들고, 친구와 함께 다른 삶을 만들어 가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여러 세미나나 강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누구나 오실 수 있으니, 일단 세미나 혹은 강좌로 접속해 주시면 됩니다.
2. 이 책은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이라는 제목 그대로 ‘문탁이 사랑한 책들’ 30권의 서평 모음집입니다. ‘문탁이 사랑한 책들’이란 문탁에서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이 반복해서 읽어 왔던 책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요. ‘문탁이 사랑하는 책들’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또 ‘문탁이 사랑하는 책들’에는 어떤 기준이 있을까요?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문탁 학인들에게 커다란 배움이 일어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우리의 생각과 삶을 바꾸고, 공통의 활동을 만들어 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책들이지요.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준 책들은 더 많습니다만, 지난 10년간의 공부를 동양고전, 인류학, 철학, 교육의 카테고리로 나눈 뒤, 세미나에서 자주 반복해서 읽게 되고, 문탁 학인들의 말과 글에 계속 등장하는 책들 중에서 30권을 골랐습니다.
3. 문탁이 사랑한 책들은 모두 ‘함께 읽은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 읽는 책은 어떤 점이 다를까요? 함께 책을 읽다 보면 혼자서 책을 읽을 때는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고, 전혀 떠올리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공부하는 친구의 생각과 만나 화학적 반응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나는 거지요. 관념과 관념 사이에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은 커다란 기쁨을 줍니다만,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나’로 변용되기 때문입니다. 또 텍스트에 대해 생각과 말을 서로 섞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눈에 보입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 역시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앎과 삶의 괴리는 곧바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책을 읽는다는 건 더 능동적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며, 다른 한편 남에게 나를 이해시키고 타자를 이해해야 하는 아주 불편하고 도전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읽을 수 없는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세미나 후에 자주 하는 말입니다. 혼자서 책을 읽으면 편식을 하기 쉽습니다. 또 웬만한 독서가가 아닌 이상 익숙하지 않은 주제나 좀 어렵다 싶은 책은 피하게 됩니다. 함께 책을 읽다 보면 서로에게 의지하며 이런 장애물을 넘어가는 멋진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스승이 되어 주는 책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유용한 책 읽기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에 더하여 책을 읽은 뒤 서로가 쓴 에세이를 읽고 피드백을 하면 아주 금상첨화입니다. 더 불편해지고 더 위험해지고 더 유용해집니다. 이렇게 계속 하다 보면 함께 책 읽는 것의 마력에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문탁네트워크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4. 문탁은 가정집 아파트 거실에서 시작된 독서 모임이 확장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셨는데요. 지금은 작은 마을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 생산(경제) 활동, 원전 반대 운동, 청소년 교육 등 분야도 특정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책 읽기(공부)와 이런 활동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앞으로 어떤 활동들을 계획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문탁네트워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10년은 공부가 새로운 공부를 낳고, 새로운 공부가 활동을 낳고, 활동이 또 다른 공부를 낳는 순환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문탁네트워크에 공부하러 온 친구들이 서로를 알아 가면서 함께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고, 다른 경험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기꺼이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맞추려 애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과 경제 세미나>가 마을작업장을 만들었고, 마을 작업장 활동을 하면서 인류학과 정치경제학 공부에 대한 열의를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자율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마을 공유지 파지사유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공동체의 철학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동양고전을 읽고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청소년과 만나는 장을 조금씩 넓혀 오는 사이에 마을과 교육이라는 주제로 공부를 심화시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는 밀양 어르신들과의 인연으로 에너지나 핵 발전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활동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녹색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공부가 어떤 활동을 낳게 될지 우리도 모릅니다. 지금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은 ‘늙음과 죽음’, ‘양생과 건강’ ‘마음과 명상수행’ ‘글쓰기’ ‘손 인문학’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의식이 깊어지고 다르게 살고 싶은 친구들이 뭉치고, 문탁네트워크 안에서 이러한 노력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생기면 또 새로운 공부와 활동의 길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5. 마지막으로, ‘마을 만들기’나 공동체를 꾸리는 데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어떤 세미나를 만들면 좋을지, ‘노하우’()를 공유해 주세요. 다른 공동체의 경험과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우리도 관심 있는 공동체들을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지금도 배우러 다닙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마다 각자의 역사와 맥락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다른 삶을 살기 위해 공동체를 꾸린다는 점은 같지만, 어떤 사람들이 모였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따라 모든 공동체는 각자의 독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노하우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로 마음을 모아 보려는 분들에게는 이반 일리치의 책들과 선물사회를 연구한 인류학 텍스트들로 공부를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책들로 시작했고, 어려움에 처할 때면 끊임없이 이 책들로 돌아가 다시 읽으면서 영감을 얻고 용기를 내기 때문입니다. 『문탁네트워크가 사랑한 책들』에 나오는 한 권 한 권이 모두 문탁네트워크를 꾸려 오는 동안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을 준 책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든 같이 책읽기를 하는 것은 마음을 모아 내고 공통의 감각을 만드는 탁월한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평범한 생활인들이 삶의 비전을 찾는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는 모임이 여기저기에서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책속에서
가끔씩 생각한다. 이 공부는 도체로 뭘까? 대학교도 4년이면 마치고, 대학원도 5년이면 코스워크를 끝내는데, 그보다 더 긴 7년간을 주야장천 계속해 나가는 이 공부의 힘은? 아카데미의 인문학조차도 교환영역에 빠르게 포섭되는 현실에서, 무용한 듯 보이는 이 케케묵은 고전을 하염없이 읽어 나가는 이 공부의 본질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연히 시작되었으나 결코 끝나지 않는 길, 질문하고 사유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도를 탐구하는 과정(子曰자왈 人能弘道인능홍도, 非道弘人비도홍인
『논어』, 「위령공」 28장) 아닐까? 혹시 우리야말로 벗과 함께 배우고 익혀(子曰자왈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不亦說乎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인부지이불온,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
『논어』, 「학이」 1장) 어느 날엔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논어』, 「위정」 4장) 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아닐까?(1부 이 험한 세상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_「인트로」 중에서)
『거대한 전환』을 읽고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갖게 되었다. 시장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삶의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의 삶 전체가 아니라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도 시장적 기초에서 비시장적 기초로 옮길 수 있을까? 그 일환으로 우리는 상호성을 높이기 위해 공동체 화폐 ‘복’을 실험해 보기로 했다. ‘복’을 주고받는 활동을 만들다 보니 세미나 외에 작은 생산 단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바느질도 하고, 비누도 만들고, 빵도 굽고, 입던 옷과 생활용품을 순환시키며 돈과 ‘복’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물품도 오가고, 돈도 오가고, 사람도 오가는 경제 활동이 생겨났다. 이런 경제 활동을 공동체적 관계를 구성하는 활동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마을경제’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을경제, 시장을 흔들어라’는 2011년 문탁 인문학 축제의 슬로건이 되었다. 생산 단위들을 모아 ‘마을작업장’을 만들었다. 작업장 일을 하며 ‘복’으로 활동비를 받고, ‘복’으로 친구들이 만든 비누와 빵을 사 먹을 수도 있었다. 활동을 많이 해 ‘복’이 많아진 친구들은 ‘복’이 적거나 마이너스인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도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이렇게 호혜성의 원리와 재분배의 원리가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었다.(2부 자본주의 내부에서 균열 내기_「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중에서)
76.5일 이후 문탁에서 밀양 송전탑 문제는 공동의 관심사가 되었고 밀양과의 인연은 더욱 돈독해졌지만, 밀양에는 결국 초고압 송전탑이 세워졌다. 송전탑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10여 년의 대립과 갈등은 더 이상 마을 사람들끼리 예전처럼 살 수 없는 마을 파괴로 이어졌다. 송전탑을 반대하던 주민들은 마을을 뜨거나 가슴속에 울화병을 담고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밀양과 무엇을 해야 할까? 『밀양을 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김은혜 옮김, 새잎, 2011), 『후쿠시마에서 불어오는 바람』(김진호 외, 갈무리, 2011)을 읽으며 우리는 밀양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이제 우리는 ‘송전탑 반대’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만나야 한다. 밀양에 송전탑이 세워진 다음, 두 해에 걸쳐 진행된 ‘밀양 인문학캠프’는 밀양과 문탁에 동시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의 우정과 공부는 무엇이어야 하나?’ (……) 『밀양을 살다』와 『녹색평론』을 읽으며, 문탁 사람들의 일상은 좀 불편해졌다. ‘싼 전기’의 편리함이 가져오는 끔찍한 국면을 알아 버린 다음에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했던 시점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여전히 우리는 전기를 쓰며 살기 때문에 불편함은 손톱 밑 가시처럼 콕콕 통증을 내보낸다. 우리는 이 통증에 둔감해지지 않기 위해 계속 공부한다. 파지사유의 밤을 동네영화관으로 만들고, 학교 안 간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며, 우리는 이 긴장감을 잃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3부 각자도생에서 함께 사는 삶으로_「인트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