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표제: Last warrior : Andrew Marshall and the shaping of modern American defense strategy 색인 수록 전자자료(e-book)로도 이용가능 이용가능한 다른 형태자료:제국의 전략가 [전자자료]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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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저자의 말 서론
제1장 독학의 사나이, 1921~1949년 제2장 RAND연구소 초기, 1949~1960년 제3장 더 나은 분석 방법을 찾아서, 1961~1969년 제4장 총괄평가의 탄생, 1969~1973년 제5장 국방부로, 1973~1975년 제6장 총괄평가의 성장, 1976~1980년 제7장 냉전의 종말, 1981~1991년 제8장 군사혁신, 1991~2000년 제9장 아시아태평양으로의 전환, 2001~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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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전략가 : 앤드루 마셜, 8명의 대통령과 13명의 국방장관에게 안보전략을 조언한 펜타곤의 현인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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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40년 이상 미국의 군사전략을 막후에서 설계한 천재적인 전략가, 앤드루 마셜 2015년 93세의 나이로 현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의 정신사를 통해 60여 년에 걸친 미국의 외교·국방정책의 역사를 파헤치다!
앤드루 마셜 ― 미국에서는 그를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에 비유했고 소련에선 ‘펜타곤의 추기경’, 중국에선 ‘은둔의 제갈량’, 일본에선 ‘전설의 전략가’로 칭했다. 그가 없었다면 세계의 군사지도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펜타곤의 현인 미국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의 3층 가장 안쪽에는 ‘3A932’라는 번호판이 붙어 있는, 보안이 삼엄한 사무실이 있다. 국방부 내에서도 비밀 등급이 매우 높은 자료들이 있는 이곳은 바로 국방장관 직속 싱크탱크인 총괄평가국(Office of Net Assessment, ONA)이다. 미국과 경쟁국들의 모든 군사전력과 전략을 비교·분석하고 향후 발생할 안보 문제와 전쟁의 양상을 예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이 부서는 1973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줄곧 한 명의 리더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는 1973년 총괄평가국 국장으로 취임한 후 2015년 93세의 나이로 공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42년간 한자리에서 같은 역할을 수행한 앤드루 마셜이다. 당파를 막론하고 모든 고위 정책결정자들에게 최고의 군사전략가로서 존중받았던 그는 8명의 대통령과 13명의 국방장관을 보좌했다. 대외적으로 나서길 꺼려하는 마셜의 성격과 기밀로 분류된 업무의 특성상 미국 내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전문가 그룹과 소련·중국 등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인물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그를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에 비유했고, 소련에선 ‘펜타곤의 추기경’, 중국에선 ‘은둔의 제갈량’, 일본에선 ‘전설의 전략가’로 칭했다. 오랜 기간 국방 설계자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어, 마셜을 추종하는 인사들은 그를 외교의 천재라 불리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나 고(故) 제임스 슐레진저 전 국방장관에 비유하기도 한다. 특히 딕 체니 전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전 세계은행 총재 등이 마셜의 스타 지지자들이다. 이 책 『제국의 전략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이후 소련과의 길고 어두운 사투를 겪은 마지막 세대이자, 무기 대신 냉철한 이성으로 싸운 ‘최후의 전사’였던 한 인물의 발자취를 통해 현대 군사전략의 탄생과 그 굴곡진 역사를 서술한다. 냉전 시대 초기부터 시작해서 소련의 해체와 이슬람 테러리즘의 발호를 거쳐 중국의 융성에 이르는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에서 마셜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고, 그에 따라 세계의 군사지도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전설의 시작, RAND연구소 앤드루 마셜은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밟다가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1949년 군사 싱크탱크인 Rand연구소에서 통계분석가로 근무하게 된다. 이후 1972년까지 23년 동안 근무하면서 ‘총괄평가’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총괄평가는 미국의 무기체계·전력·작전교리·교육훈련·군수·자원 할당·전략·전력 효율성 등을 기존의 또는 잠재적인 경쟁국과 철저히 비교하는 것이다. 미국이 경쟁국 또는 적국과 다양한 영역에서 벌이는 군사적 경쟁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꾸준히 파악하고, 또 미래에 나타날 문제와 전략적 이점을 충분히 예견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소련 전력 분석과 전략 수립에서 탁월한 성과를 인정받은 마셜은 1973년 국방장관 슐레진저의 요청으로 새로 창설된 총괄평가국(ONA)의 국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42년간 경쟁국들의 전력 분석과 미국의 군사전략 수립에 필요한 정보와 혜안을 국방장관들에게 직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마셜은 소련과 길고 고통스러우며 위험한 대립을 하고 있던 미국의 최고 전략가로 성장했다. 냉전 종식 이후 그는 미군 군사혁신 논쟁을 주도했고, 향후 미국 안보환경의 변화와 21세기 안보 문제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예측했다. 1970년대 초반 소련이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전략 핵전력을 보유했을 때부터 2001년 9·11 테러 공격으로 촉발된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이르기까지, 마셜의 총괄평가는 고위 국가안보 관료들이 대비해야 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큰일을 매우 정확히 예견해 주었다. 또한 그는 정밀유도 무기의 보급과 미국의 전략적 경쟁국으로 성장한 중국으로 인해 전쟁의 양상이 크게 변할 것임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내다보았다.
마셜의 공적 마셜의 공적은 비밀에 싸여 있다가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의 하나가 이른바 냉전 시대 소련을 대상으로 한 ‘경쟁전략’의 고안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 국방부의 가장 큰 고민은 소련의 군사비 지출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였다. CIA는 소련이 GNP의 6~7퍼센트만을 군사계획에 투자하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마셜은 다양한 분석을 토대로 소련의 군사비 투자 비율이 소련 GNP의 30퍼센트를 초과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과도한 군사비 부하가 결국 소련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판단에, 소련의 군사 위협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는 대신 소련이 군사력에 과잉 투자하도록 더 유도해 소련 붕괴를 재촉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비용 강요 전략’이라고도 불리는 이 경쟁전략은 소련 해체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마셜은 늘 10년, 20년 후를 내다보고 장기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해결책보다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는 데 골몰했다. 그렇기에 그의 분석과 예측은 누구보다 정확했고 빨랐다. 마셜은 냉전이 무너진 뒤에는 이슬람 테러 세력의 등장을 예고했다. 또 일찌감치 1987년에는 ‘앞으로 수십 년 내에 중국이 소련을 능가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여, 미국의 가장 큰 도전자가 될 것임’을 국방부 고위 관료들에게 주지시켰다. 조지 W. 부시 전 정권 시절 군사계획의 초점을 유럽에서 태평양지역으로 전환하고 외국의 군사기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대신 장거리 전투능력 제고로 방향을 튼 것도 그의 구상에 기인한다. 군사분야의 기술혁명(RMA) 예측 및 대응책 마련도 그의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실제 마셜은 1980년대에 이미 최첨단 센서와 정밀유도폭탄, 컴퓨터 네트워크에 기반한 무기의 도래를 예고했다. 마셜은 군사혁신 관련 논의를 장려했고, 용어의 정립과 미 국가안보 관련 논의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전략판단에 있어서 여러 기준을 제시한 멘토이기도 했다. 국가안보에서 자원이 가지는 중요성 간파, 다양한 각도에서의 적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 군사적 경쟁에 대한 사고의 틀 짜기, 장기 경쟁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의 중요성, 인간 행동의 비합리적 측면에 대한 고찰, 미래 예측의 어려움과 전략분석가로서의 자세 등에 대해서 늘 강조하고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지도를 받고 각계각층의 전문가로 성장한 이들을, 사람들은 ‘성(聖) 앤드루 학당’ 졸업생들이라 부른다. 외교와 국방에 미친 마셜의 영향력은 학계에서도 공인된 부분이기도 하다. 군사 정보의 역할과 적 공격의 예측, 그리고 그에 대한 효과적인 억제 능력에 관한 관점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평가받는 두 책의 저자, 즉 『결정의 본질』의 그레이엄 앨리슨과 『진주만: 경고와 결정』의 로버타 월스테터는 자신들의 작품이 앤드루 마셜로부터 영감을 얻어 집필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이래, 앤드루 마셜은 음지에서 미국 국가안보 및 국방전략의 발전에 60년 이상 헌신했다. 외부적으로는 세계의 강대국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변화를 싫어하고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하는 관료조직과 끊임없이 부딪쳐야 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미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걸어온 발자취이기도 하다. 내부적으로는 파벌 정치가 더 극심해지고 외부적으로는 국제 관계가 더욱 복잡해지는 한국의 현실에서, 앤드루 마셜의 고민과 삶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책속에서
[P.24] 최근 전략연구계의 일각에서는 앤드루 마셜을 가리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이름 없는 인물”로 말한다. 어떤 국방 전문가들은 그를 영화 <스타워즈>의 캐릭터 이름을 따서 ‘요다’라고 부른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면서 오랜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오랫동안 엄청나게 많은 학자와 고급 관료들에게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후배들은 ‘제다이 전사’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 ‘제다이 전사’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표현은 좀 더 완곡하다. ‘성 앤드루 학당 동창회’가 그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마셜에게서 배운 것이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업무에 매우 근원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P. 129] 마셜의 장기 경쟁 체제는 군사력 판단 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보고서를 넘어서, 미국 냉전 전략에 영향을 준 분수령적인 문건이었다. 그는 언제나 미래를 내다보고, 평시 장기 경쟁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지엽적인 것보다 우선시한 실용적인 전략가였다. 그리고 1969년 가을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시작으로, 마셜은 전략적 통찰과 시각을 워싱턴DC에까지 퍼뜨리게 된다.
[P. 192] 슐레진저는 역대 국방장관 중 가장 유능한 전략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력이 가장 뛰어난 국방장관은 아니었다. 국방장관은 백악관·내각·의회·언론의 정치적 움직임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슐레진저는 자신의 신념을 국익에 맞게 조화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원칙을 정치적 편의와 타협시킬 생각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셜이 했던 이런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건 기쁨이 아닌, 정보를 주기 위함이다.” 국가안보에서만큼은 타협을 모르던 슐레진저의 길에는 친구가 없던 적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