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에는 공부를 하고 이것으로 생계도 해결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허생이나 ‘양반’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은 거의 없다.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살림살이를 외면하고 공부에만 매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부를 하더라도 생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것이다. 생계는 숭고한 이념보다 더 숭고한 가치이므로, 무엇을 하더라도 생계는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와는 별개로 공부는 본질적으로 자기 충족적인 행위일 때 그 자체로 아름답다. 축구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지는 않는다. 오직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끼면 그만이다. 공부도 그렇다. 그 무엇으로 생계를 이어 가든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긴 인생을 두고 지속되어야 할 공부를 떠받치는 지적 근육이라는 점만은 기억해 두자. 자격증 취득이나 시험 통과와 같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공부가 없지는 않겠지만, 모든 공부는 그 자체로 완결되는 행위이자 또 다른 공부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한 걸음일 따름이다.
? <1-1 공부는 왜 하는가> 중에서
유리에게는 주몽의 모습도 얼마간 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로부터 과감하게 분리하는 모습이다. 무력한 아들을 보호하는 아버지의 생물학적 기능이 언제까지고 유효할 수 없다. 보호받기만 하고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면 어른이 될 수 없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그때부터는 어른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아버지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유리가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입증하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던 것, 유리 또한 자신의 아들 무휼이 가진 그런 능력을 확인하고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 이 모두가 어른 됨의 승인이라 할 것이다. 유리는 아버지를 찾아갔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아버지 떠나기’를 배워 이를 몸소 실천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과연 어떤가? 청소년기에는 입시 경쟁, 청년기에는 취업 경쟁, 장년기나 노년기에는 퇴출의 공포에 맞서는 생존 경쟁이 우리 시대의 삶을 견인한다. 우리는 그 경쟁을 즐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거기에 압도당한다. 이러한 경쟁의 연속선상에서 혹 우리는 보호받아야 하는 시기를 최대한으로 늘리고자 하지는 않는지? 꾸준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 <1-3 부모를 왜 떠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