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로, 역사와 만날 때 광활해지는아담한 길이다. 광주의 오랜 중심도로인 데다 거리에 깃든 묵직한 역사에 비하면 금남로의 규모는 의외다. 시작점인 수창초교부터 중간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거쳐, 끝점인 전남도청까지 겨우 1.5km다. 왕복 5차선 너비라서 건너편에 지인이 걸어가면 서로 알아보고 인사도 나눈다. 그런 금남로는 사람들이 가득 차면 바다처럼 넓어 보이고 사람이 없으면 강줄기처럼 여겨진다. 역사와 만나 호흡할 때 비로소 금남로다워진다. 짧고도 긴 도로, 좁고도 무한히 넓은 도로다.
금남로 바닥과 돌 틈에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의 총소리가 새겨져 있을 것만 같다. 무장한 국군 특수부대가 무장하지 않은 자기 나라 국민에게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고 급기야는 총을 난사했다. 한국전쟁 때도 시가지에서 그처럼 참혹한 살육이 벌어진 적은 없다. 총소리, 비명소리, 발소리들이 뒤엉켜 금남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거리는 일순간 텅 비었다가 놀랍게도 다시 채워졌다. 골목들로 흩어져 숨을 고른 시민들이 다시 몰려나왔다.
공중의 헬기에서, 건물 옥상 어딘가에서 계엄군의 조준사격이 더해졌다. 아비규환의 지옥인데도 금남로는 텅 비지 않았다. 도망가던 시민들이 뒤돌아섰다. 분노가 마침내 죽음의 공포를 이겨버렸다. 자신이 총을 맞지 않은 것은 거리에 쓰러진 저 사람이, 나의 이웃이 대신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계엄군도 충격을 받았다. 한 시민은 “신군부가 (권력 찬탈을 위해) 제물이 필요했다면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 저항이 너무 거셌다. 우리는 그런 무도한 군인들을 처음 보았고 계엄군도 그렇게 거센 군중을 처음 보았다”라고 회고했다.

1976년 늦가을부터 1978년 봄까지 햇수로 3년을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