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이동의 자유와 (타자에 대한 배제에 기초한) 국민국가의 본질 사이의 동학에 관한 역사적 성찰
국가는 어떻게 국민의 이동권을 규제하는지, 그것을 왜 국가의 배타적 권리로 삼는지를 밝히는 사회학적 탐구
오늘날의 난민, 즉 ‘여권 없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의 기원에 대한 생생한 경험적 기록
‘여권’이라는 이동 증명서, 해외여행의 ‘필수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 지구적 감염병 위기로, 거의 실종되다시피 한 해외여행. 많은 사람이 감염병 유행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하던 시절을 꿈꾼다. 2019년 기준 한국은 전 세계에서 해외여행을 여섯 번째로 많이 한 국가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에서 해외여행은 보통 사람이 꿈꾸기 힘든 ‘금지’된 것이었고, 1989년에야 전면 자유화가 되면서 여권 발급이 수월해졌다. ‘대한민국 여권’의 위상 역시 높아졌는데, 영국의 시민권.영주권 자문회사 ‘헨리 앤드 파트너스’가 매년 발표하는 ‘헨리 여권 지수’에 따르면, 2021년 한국의 ‘여권 파워’는 일본(191개국)과 싱가포르(190개국)에 이어 독일과 함께 세계 3위이다. 한국인은 사증 없이 여권만으로도 189개 나라를 방문할 수 있다.
여권은 자유로운 이동을 보증해 주는 서류인 동시에, 국가가 바라지 않는 사람의 출입국을 통제할 수 있는 규제 수단이기도 하다. 여권을 가진 사람은 ‘국적 있는’ 사람이 되는 반면, 여권이 없는 사람은 ‘국적 없는’사람이 된다. 여행 도중 여권을 분실한 사람이 처하는 모든 난관은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여권에 대해, 여권이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역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기념비적인 연구” ‘여권’의 이면에 숨겨진 포섭과 배제의 논리
<여권의 발명>은 여권과 관련된 법의 역사와, 이를 둘러싼 의회 내 논쟁, 나아가 여권법의 시행에 따른 사회의 대응을 살피면서 ‘여권’이라는 이동 증명서 이면에 숨겨진 정치사회적 포섭과 배제의 논리를 일괄한 책이다. 저자 존 토피는 근대 국민국가 및 국가 간 국제 체계가 합법적 이동 수단을 독점해 왔고, 이 때문에 다양한 사람이 국가의 권위에 (특히, 국경을 가로지르는 이동과 관련해) 종속됐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합법적 ‘이동 수단’으로서 ‘여권’과 국가 및 국제 여권 시스템의 변천사를 상세히 다루면서, 왜 이동 수단을 통제하는 일이 근대 세계의 근간이 되는지를 역사 사회학적으로 밝힌다.
‘여권’이라는 신분 증명 문서가 수행하는 역할과 위상을 다룬 이 책의 초판(2000)은 “유럽의 여권에 대한 기념비적인 연구”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유럽 이주사, 다문화와 관련한 세미나와 수업 등에서 교재로 널리 사용됐고, 제임스 스콧 등 여러 비평에 주요하게 언급됐다.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2018년 개정된 제2판을 한국어로 옮긴 것으로, 저자는 이 개정판에서 학계의 비평들에 대해 논평하고, 9.11 테러 이후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여권 규제 정책에 대해 추가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권 없는’ 사람들과 ‘국가 없는’ 사람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여권의 역사를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것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이후 국제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변화에 관해 숙고해 보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 같은 붕괴를 배경으로, 국가가 해체된 지역의 사람들 또는 전쟁과 분쟁의 결과로 떠돌아다니게 된 사람들의 ‘국적’에 관한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나타난 과정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유럽 대륙에서 제국들이 붕괴한 이후, 역사에 의해 버림받았던 사람들의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 이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국민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떤 국가에 연고가 있었고, 그들이 국가에 빚진 것은 무엇이었으며, 국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가? - 본문 중에서
2015년 이후, IS와 시리아 내전 등으로 일어난 중동-유럽의 대규모 난민 이동 사태, 트럼프 집권 이후 미국의 불법 체류자들에 대한 대대적 단속과 멕시코 국경을 따라 길게 세워진 장벽 등에서 보듯, 지금도 ‘국가 없는’ 사람들의 이동에 대한 통제와 불법 체류에 대한 대대적 단속이 계속되고 있다. ‘국적 없는’ 사람들은 다시 말해, ‘국가 없는’ 사람들, 바로 ‘여권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는 이들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그들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시작은 여권 제도의 역사와 그 포섭과 배제의 논리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P.11] 여권의 역사를 살펴보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것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이후 국제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변화에 관해 숙고해 보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 같은 붕괴를 배경으로, 국가가 해체된 지역의 사람들 또는 전쟁과 분쟁의 결과로 떠돌아다니게 된 사람들의 ‘국적’에 관한 문제가 또 다시 발생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나타난 과정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유럽 대륙에서 제국들이 붕괴한 이후, 역사에 의해 버림받았던 사람들의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 이에 대해 서술한 바 있다. 국민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어떤 국가에 연고가 있었고, 그들이 국가에 빚진 것은 무엇이었으며, 국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가? - 서문
[P. 15~16] 우리가 살펴보게 될 것처럼, “국경”은 언제나 지도에 그러진 선 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변적인 것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국경을 넘을 기회가 전혀 없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여권이 있더라도, 그들이 소지한 여권은 사증이 없다면 국경을 넘을 수 없다. 이럴 경우, 사증을 받는 데 소요되는 돈과 시간을 비롯한 여타의 비용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올라간다. - 서문
[P. 25]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이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생산수단”을 빼앗는 과정을 수반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 과정의 결과로 노동자는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박탈당하고 생존을 위해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제공하는 임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수사법을 차용해, 마르크스의 위대한 계승자이자 비판가인 막스 베버는 근대의 주된 특징이 국가가 개인으로부터 “폭력 수단”을 성공적으로 빼앗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세 유럽을 비롯한 여타 지역의 많은 역사적 경험과는 달리, 근대 세계에서는 오직 국가만이 “합법적으로”폭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폭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은 그러기 위해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그런 허가를 받지 못한 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자유를 빼앗기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베버가 사용했던 수사법을 따라, 이 책은 근대국가들과 그들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국제 국가 체계가 개인과 사적 단체들로부터 합법적인 “이동 수단”을 빼앗아 왔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한다. 비록 그런 이동 수단이 국가 간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에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 「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