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도 한 번 먹어봐요. 크림치즈가 들어 있어서 젊은 사람들이 제일 좋아해!”
“우리 집 꿀빵이 작년 통영 꿀빵 품평회에서 1등 했어요. 먹어봐요.”
“팥 앙금 대신 유자가 들어 있어서 아주 상큼하고 맛있으니까 먹어 보세요!”
들어는 봤나. 삼보 일꿀빵. 통영 바다 앞 문화마당을 걸어가려면 세 걸음에 한 번씩 꿀빵을 먹어야 한다. 가게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쓱 다가와 꿀빵 한 조각을 손에 먼저 쥐여주는 적극적인 점원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 집에서는 오리지널 팥, 저 집에서는 크림치즈, 거기에 고구마, 유자, 호박, 초콜릿, 치즈 등 끝없이 달라지는 속 재료를 보면서 시식 욕구도 끝없이 샘 솟기 때문이다.
한 손에 묵직한 꿀빵 한 봉지를 흔들며 길 건너편을 내다보면 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바다가 마냥 평화롭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은 꿀빵 덕분에 마음이 달달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통영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빛났다. 『김약국의 딸들』의 첫 몇 문장만 보아도, 대한제국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로 급변하는 시대에도 이 평화로움이 변함없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꿀빵을 먹으며 여행은 시작된다’ 중에서
사실 용란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것은 무릎 건강보다는 남자 걱정이다. 연학이와 결혼을 하긴 했지만, 옛 연인 한돌이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연학이가 잠시 유치장에 들어간 틈을 참지 못하고 용란이는 한돌이를 데리고 두 집 살림을 차리고야 만다. 용란이의 두 번째 신혼집은 북문 밖이었다. 용란이의 엄마인 한실댁은 그 집을 찾아가기 위해 북문 밖 좁은 오르막길을 오르며 힘겹게 한숨을 몰아쉰다. 하지만 통영 사대문의 북쪽 오르막길은 어차피 그 길이가 그리 길지 않다. 크게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을 보면 진짜 몸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딸의 외도를 확인하러 가는 마음이 고되었던 것은 아닐까.
- ‘간창골 김약국네 다섯 딸’ 중에서
김첨지가 누볐던 경성은 아직 조선 시대 한양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한양도성을 기준으로 도시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롭게 나타나는 변화가 놀라운 시기이기도 했다. 사방으로 달리는 전차를 보며 젊은이는 전차 승무원 같은 전문기술가를 꿈꾸기 시작했고, 현대적인 학교와 극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김첨지가 달리는 길에는 쪽 찐 머리를 올린 마나님도 계셨지만, 커피 한잔을 즐기러 카페를 찾아가는 모던보이도 있었다. 김첨지의 삶은 곤궁했으나, 경성 한복판에서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을 만나며 하루하루 다르게 근대화되는 변화의 속도를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 ‘삶의 반경은 삶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중에서
윤공희 대주교는 근무실 창을 통해 금남로에서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하는 시민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에 계엄군의 무력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젊은이를 보며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는 점점 더 잔혹해지는 정부의 무력사태에 진실을 알리기로 하고, 외부와 단절된 광주의 사태를 밖으로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중략) 그의 근무실 창문을 통해 금남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우리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들을 침묵하며 바라보았다. 차량과 사람으로 가득한 이 거리가 한순간에 폭력과 피로 물든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심정이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 그저 나에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밖에는… 나는 못할 것 같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거운 부채감만 남을 뿐이었다.
- ‘사건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 금남로’ 중에서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를 기억하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더 많은 『소년이 온다』 『차남들의 세계사』를 만나게 될 이유이다. 무심히 스쳐 지나갔던 공간마다 아주 긴 시간에 걸친 수많은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쌓이고 있다. 물론 많은 이야기가 또 잊힐지도 모른다. 아니, 잊힐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기록만 해둔다면,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다시 읽히고 해석될 거라 믿는다. 그 사실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의 이곳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 ‘공포의 일상화’ 중에서
처음 신도림역에서 환승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나름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이라 시간적 여유를 넉넉히 갖고 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도림역에 서서 낯선 지명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걸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울 것 같은 기분을 꾹 참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원하던 플랫폼을 찾아갔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지하철에 타고 있었는데, 내려야 할 역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급행열차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며, 꼭 빨리 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마저도 인생과 같지 않은가.
- ‘삶은 야구라기보단 신도림역 같은 것’ 중에서
세상에는 숫자로 말해줘야만 믿는 사람도 있다. 남일대 해수욕장이 얼마나 작은지 믿지 못할 사람이 있을 거 같아서 파도가 치는 바다를 왼쪽에 끼고 모래사장 이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걸어보았다. 딱 256걸음. 성큼성큼이 아니라 아장아장에 가까운 걸음걸이였음에도 그것밖에 안 된다. 일반적인 성인의 평균 보폭이 75cm라고 하니, 아무리 넉넉잡아도 200m도 안 되겠다. 달리기 연습을 할 직선거리로 겨우 50m를 잡았다는 것이 아주 과장이 아닌가 보다.
- ‘코끼리 바위와 남일대 해수욕장’ 중에서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여러 형태와 여러 가치가 있으며 단적인 기준으로 인생의 성패를 나눌 수는 없다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그렇게 말한다. 삼천포의 매력에 빠진다면, 앞으로 달려나가는 방식의 삶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런 방식의 삶이 자신에게 맞지 않더라도 맛있는 해산물, 아름다운 바다, 소담한 주변 지역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절대 손해는 아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에 빠지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 ‘삼천포에 빠지는 건 멋진 일이다!’ 중에서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상대를 잘 알지 못한다. 콩깍지가 씌었으니 일단 다 좋아 보이기 마련이다. 어차피 누군가를 완벽히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지만, 처음에는 상대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다가 사귀면서 조금씩 알아가는 경우가 많다. 당장 계나만 해도 큰 결심을 하고 호주로 떠난 것이지만, 정작 호주가 어디에 있는지 주변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는지 찾아보지 않았던 듯하다. 인도네시아인 남자친구 리키를 만나기 전까지는 호주가 인도네시아랑 가까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알고 보니 새로운, 호주 너란 녀석’ 중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이 정해져 있지는 않을 거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에 등장한 친구들만 보아도, 계나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복에 다가갔다. 삼미 친구들이 보여준 방법은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잘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볼멘소리가 나오려나. (…중략) 삼미 친구들과 계나의 방법이 조금 극단적으로 느껴진다면, 현시점 한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자 노오력하는 가장 표준형 인물인 지명이처럼 순응하는 방법도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이 개인이 적성과 성향에도 맞는다면, 어떤 면에선 좀 부러운 사람들이다. 아니면 성공적인 안착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적당히 적응하고 만족하며 행복을 찾는 건 어떤가.
- '아무튼, 행쇼!' 중에서